제조 공정 3~4년마다 바뀌는데, 안전관리는 70년대 수준

중앙선데이

입력 2013.03.31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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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호 06면

“현관문을 누가 발로 걷어찬 것처럼 ‘꽝’ 하는 소리가 났어요. 옥상에 올라가 보니 이웃 사람들도 다 나와서 ‘뭐야 뭐-’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아직도 가슴이 뛰고, 불안해요.”

잇단 화학물질 유출 사고 해법 심층분석

여수산업단지 폭발 사고 2주일이 지난 28일. 공장 인근인 여수시 해산동 해지마을에 사는 신정옥(58)씨는 “아직도 진정이 안 된다”고 말했다. 6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친 사고의 충격파는 컸다. 해산동 내 주택 20여 채가 창틀이 휘는 등 크고 작은 피해를 봤다. 405명의 주민 중 60여 명이 신경안정제 처방을 받는 등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다.

해산동 마을회관에는 ‘불산보다 더한 독성 속에 불안해서 못 살겠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사고 직후인 19일 만들어진 ‘공해이주대책위원회’가 내건 구호다. 해산동 대평마을 주민 김해곤(67)씨는 “공단에서 마을 쪽으로 바람만 불어도 목이 조여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후 경기도 화성시 반월동. 1월 27일 불산 유출 사고로 1명이 숨지고 4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이 있는 곳이다. 사고 두 달이 지난 이날 오후, 사업장에는 뿌연 안개가 보였다. 공장 벽에는 ‘수증기 발생 지역’이라는 글씨가 큼직하다. 매연이 아니고 수증기란 뜻이다. 하지만 사고를 겪은 주민들의 심정은 다르다. 공장 인근 화성시 능동에 사는 임모(58·여)씨는 “사고 후부터 연기가 수증기로 보이지 않고, 유독가스가 포함된 게 아닌가 싶어 불안하다”고 말했다.

사고 일단 터지면 여파 끝없어
산업재해는 사고 자체도 문제지만 후유증도 이에 못지않다. 인근 지역사회에도 상상 이상의 여파를 미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직접적 피해가 아니더라도 주민들이 느끼는 불안감이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 간접 피해는 결코 작지 않다. 해당 기업들이 이미지 타격이나 지역사회의 신뢰 저하 등 두고두고 치르는 대가도 크다. 청주 SK하이닉스에서 22일 발생한 염소 누출 사고도 그렇다. 최근 잇따른 대형 사고의 영향 탓인지 주민들의 동요는 심각하다. 청주시 외북동에 사는 유모(50·여)씨는 “공장 가까이 사니까 뭔가 또 누출되는 게 아닌가 불안하다”고 말했다.

대형 사고가 빈발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시설 노후화 ▶하청·재하청 구조에 따른 안전관리 인식 저하 ▶종합적 사고 대응 시스템의 부재 등이 지적된다.

시설 노후화는 상당수 전문가와 시민단체 등이 문제시하는 요소다. 구미·여수 등 주요 국가산업단지가 본격 가동된 지 30~40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고 원인을 노후화된 시설에만 떠넘겨서는 안 된다는 반론도 많다. 여수시청 산단지원과 성동범 과장은 “화학 산업의 경우 기술 발전과 시장 변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적어도 3~4년마다 공정을 교체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문일 교수도 “시설 노후화만 따지자면 산업혁명 당시부터 공단이 조성된 영국이 제일 심각해야 할 텐데 현실은 그 반대”라며 “정기적인 점검과 시설 교체는 꼭 필요하지만 사고의 근본 원인을 시설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안전관리 등 핵심 업무를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관행도 문제다. 여수 사고의 경우 대림산업이 보수공사를 하면서 하청을 주고, 하청을 받은 기업이 다시 용접 등 현장 작업을 재하청 주는 과정에서 안전관리가 소홀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전승욱 민주노총 여수지부장은 “사고를 당한 이들은 용접 전문가일 뿐이지 현장의 위험성에 대해 알 수가 없지 않느냐”며 “원가 절감을 위해 노동자의 안전을 무시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강력한 종합 컨트롤타워 꼭 필요
하청·재하청 문제도 결국은 안전관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게 원인이다. 한성대 박두용 교수는 “안전관리는 한 번 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적인 투자가 필요한데 최근 수년간 성장 위주의 정책으로 정부와 기업 모두 이 분야에 소홀했다”며 “원청·하청 관계 등 변화하는 고용 현실에 맞게 안전관리 체제도 따라 변해야 하는데 법과 제도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새로운 제품에 맞춰 제조 공정과 설비는 3~4년마다 바뀌는데, 안전관리 체제는 새로운 시설·근무형태에 맞추지 못하고 7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잇따른 사고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성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방식이 구태의연하다고 지적하는 이도 많다. 소 잃고도 외양간을 못 고친다는 얘기다.

경북대 환경공학과 민경석 교수는 “사고 예방 대책이나 안전 수칙, 규정 등이 없는 게 아니라 다 있다”며 “문제는 그게 안 지켜져 사고가 나는 안타까운 일이 반복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사고가 나면 관계 부서에서 하루 이틀이면 보고서가 쏟아져 나오는데 대부분 사고의 경과와 간단한 원인 분석에 그친다”며 “사고가 나면 왜 났는지, 어떻게 대처했고 개선점은 무언지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해 철저하게 분석하는 백서가 나와야 하는데 이런 게 없다”고 말했다.

사고가 나도 관계자나 해당 기업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 없어 비슷한 사고가 이어진다는 지적도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쏟아진다. 실제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최근 3년간 발생한 중대 재해 2290건을 조사한 결과, 사업주에 대한 처벌은 벌금형이 57.2%였고 징역형은 2.7%에 그쳤다.

각종 유해물질에 대한 관리 감독 주체가 너무 많다는 점도 문제다. 종합적인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얘기다. 대규모 공장이나 산업단지에서 사고가 발생하고 피해가 인근까지 미칠 경우 관계되는 법령은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화학가스법, 전기안전법 등 무수히 많다. 당연히 법에 따라 관리하는 기관도 많다. 여수시청 산단관리팀 관계자는 “위험물은 소방방재청에서, 가스는 지자체에서 하고 인사 사고는 고용노동부에서 하는 등 복잡하다”며 “우리는 예전부터 산업단지 안에 종합방재센터를 지어서 관련 기관이 모두 함께하는 체계를 갖추자고 정부에 건의했는데 아직까지 이뤄진 게 없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도 CSB(Chemical Safety and hazard investigation Board·화학 안전 사고조사위원회) 같은 종합적인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그래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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