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귀에 듣기 좋은 역사만 들으려 해선 안 돼”

중앙선데이

입력 2013.03.31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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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호 12면

최정동 기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52·사진)이 약 2년간 중앙SUNDAY에 연재된 ‘근대를 말하다’를 지난 17일 끝마쳤다. 우리네 고달픈 근대사를 읊었던 이 소장이었지만 “더 깊이 들어갈 부분도 많았는데 방향을 잃을까 봐 그러지 못했다”며 못내 아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역사학계의 풍운아’답게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에 대해선 날 선 비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요즘 연구소에서 역사 강좌를 강의하며 한국학대학원대학 설립의 꿈을 다지고 있다. 1997년부터 집필 활동을 하면서 마감시간을 한 번도 어기지 않는 비결도 털어놨다. 오랜 집필 활동에 지쳤는지 그는 “배낭 하나 메고 오지를 탐방하며 안식년을 갖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27일 오후 이덕일 소장을 만나 역사와 한국 사회에 대한 고민을 들었다. 대담은 중앙SUNDAY 이양수 편집국장이 진행했다.

‘근대를 말하다’ 2년 연재 마친 이덕일 소장

 -2011년 3월부터 ‘근대를 말하다’를 연재하며 고생이 많았겠다.
 “한·중·일을 종횡으로 잇는 선행 연구가 너무 없었다. 일제 식민지였던 한국 사회를 규정한 힘은 한국보다 오히려 일본 쪽에 있었다. 우리 입장에선 독립운동사가 중요하겠지만 당시 국제정세의 종속변수였다. 어쨌든 우리 역사가 아시아 세계와 전면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는 관점을 강조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사회주의운동사나 아나키즘운동사 등을 소개했다. 만주의 3부(府), 즉 참의부·정의부·신민부라는 그동안 묻혀진 항일 무장투쟁의 의미도 되짚어 봤다.”

 -2년간 한 번도 마감시간을 어긴 적이 없다. 비결은 뭔가.
 “직장인처럼 똑같이 출퇴근하며 낮엔 개인 약속을 삼간 채 자료를 보거나 글을 썼다. 신문 1개 면 전체를 줄곧 써야 돼 압박도 적지 않았다. 내가 잘 아는 조선시대가 아니라 새로 자료를 찾아야 되는 분야여서 매번 다음에 뭘 써야겠다고 고민하며 준비했다. 글쟁이에게 마감이라는 건 가장 기본적인 약속이지 않나.”

 -대략 100년가량의 근대사지만 구체적인 사료가 부족하진 않았나.
 “역사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사료가 부족한 반면, 어떤 부분은 너무 많이 중복돼 있다. 그중 일본·중국 현대사와 한국사의 관계를 설명해 줄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중·일의 1차 사료를 직접 본 뒤 그걸 독자가 이해할 수 있게끔 노력했다. 일본 고서점도 여러 차례 다니고 중국을 갈 때마다 서점들을 순방했다. 그렇게 꾸준히 모아놨던 사료들을 많이 활용했다. 매회 수십 권을 참고했다고 말할 수 있다.”

 -더 다루고 싶었던 부분은 없었나. 남북 분단의 경우 외세 때문이라고 했는데 내적인 요인도 있지 않았나.
 “그건 따로 한번 더 해야 할 얘기다. 내가 우려하는 건 우리 사회가 그것을 소화할 만큼 성숙해 있느냐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그게 형성되는 원인, 뿌리, 과정이 있다. 우리는 해방과 내전을 겪었지만 남북 모두 그런 시스템이나 지배세력이 유지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만 바라보는 진영 논리가 작동하는 사회다. 양쪽 세력을 묘사하다 보면 때론 이쪽을 비판할 수도, 저쪽을 옹호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우리 사회는 1차 사료나 근거를 갖고 다투는 게 아니라 먼저 편을 가른다. 우리가 통일을 지향한다면 북한을 통합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잘못한 건 잘못했다 말하고, 북한의 잘못된 부분도 비판해야 한다. 그래야 양쪽이 서로 공감하고 통합을 지향하는 논리가 나올 수 있다.”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항일 무장투쟁에서 찾으려는 이도 있는데.
 “항일 무장투쟁을 얘기하면 김일성이 수행했던 동북항일연군을 많이 떠올린다. 그러나 무장투쟁의 꽃은 1920년대 참의부·정의부·신민부(3府)였다. 그때가 가장 전성기였다. 당시 국경지대는 상시적인 접전 지역이었다. 내가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한 식민사학자들이 독립운동 자체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반 대중들이 잘 아는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 같은 것만 가르쳤다. 그 결과 무장투쟁 하면 1930년대 말 중국공산당 산하부대 비슷했던 동북항일연군 산하 한인들 일부의 무장투쟁을 떠올리게 됐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우경화가 심각하다. 일본은 왜 독일처럼 반성하지 않나.
 “독일은 패전 이후에 모든 시스템이 나치와 단절하는 방식으로 재건됐다. 독일에선 지금도 딴 것은 자유민주주의로 다 용인하지만 나치를 옹호하면 바로 감옥에 보내지 않나. 그런데 일본에선 군국주의 시스템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 일왕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벌하고 광범위한 인적 청산을 했어야 마땅하다. 그걸 못해서 기시 노부스케 같은 전범이 계속 총리를 하고, 국민들도 자기네가 잘못한 게 없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됐다. 한반도 침략, 만주사변, 동남아 침공, 미국 공격 등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힘이 없어서 우리가 졌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일제시대의 일본인들도 극소수를 빼곤 모두 불행했다.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는 스스로의 반성과 각오가 있어야 해결될 수 있다. 우리가 만날 항의해 본들 불가능하다.”

 -이 소장께선 ‘역사는 딱딱한 학문’이라는 도식을 깨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강단 사학계에선 정조 독살설 같은 음모론을 남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나는 일관되게 두 부분을 비판해 왔다. 첫째 노론 사관이다. 노론 세력은 인조반정 이후 250년 가까이 집권하고도 나라가 망할 때 나라를 팔아먹는 데 가담했다. 그 다음이 일제 식민사관이다. 이것들이 잘못됐다는 전제를 해야 그 다음 논의가 가능하다. 이 나라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정조 독살을 얘기하면 바로 자기들을 향한 공격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문 사관, 당파 사관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역사 해석을 가로막는 주범 중 하나는 문중 의식이다. 조선시대에 진짜 양반은 인구의 3~5%밖에 안 됐는데 자꾸 양반의 관점, 특정 가문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려 한다. 정조 독살 혐의가 없다면 그쪽에서도 1차 사료를 대고 반박하면 되지 않겠나. 그런데 자꾸 이덕일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을 해댄다. 또 한(漢)사군이 한강 북부에 있었다는 사료는 단 한 개도 없다. 반면에 만주에 있었다는 1차 사료는 너무 많다. 중국 학자들이 동북공정을 할 때도 한국 주류학자들의 주장을 인용하는데 우리 역사학계에서 좀 더 합리적인 토론이 성사됐으면 좋겠다.”

 -한국학대학원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요즘 연구소에서 교양과목, 전문 강좌를 하고 있는데.
 “연구소 전문 강좌는 이번이 3학기째인데 재수강률이 대단히 높다. 수강생 30여 명 중엔 고위 공직자나 대기업 임원, 의사·약사 같은 전문가들도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인문학에 굶주려 있다. 강의 자료로는 한·중·일의 1차 사료를 쓴다. 예컨대 중국 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를 갖고 한국 고대사의 강역 문제를 다룬다. 또 삼국통일을 전후한 한·중·일 3국의 역사를 각국 원전으로 비교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역사는 다른 분야와 다르다. 예를 들어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사마천은 한나라와 맞서 싸운 항우 이야기를 황제와 관련한 본기에 써놓았다. 반면에 체제 순응적인 반고는 본기에 써놨던 걸 열전으로 빼놓았다. 거기에서 역사학자의 관점이 드러난다. 요즘 우리 사회는 자기 귀에 듣기 좋은 역사 얘기만 해달라고 요구하는 풍조가 있다. 조선시대의 ‘사화’를 쓸 때 선비 사(士)자와 함께 역사 사(史)자도 쓰지 않나. 자기 정체성을 찾고 한 사회를 고차원적으로 통합하려는 게 바로 역사학이다. 우리 세대의 기대수명이 크게 늘고 있는데 제 2의 인생에 가장 좋은 게 공부라고 생각한다. 역사 공부를 하면 재미와 의미를 함께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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