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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이조중엽∼말엽 인물중심|최초의 총리 대신 도원 김홍집(상) - 유홍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비운의 역적 누명>
김홍집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정치제도가 채택되었던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에 첫 내각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이후 1896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두 차례나 내각을 다시금 책임져야했던 당대의 지도적인 정치가였던 동시에 역적의 누명속에 광화문 앞길을 선혈로 물들이며 비명에 숨져가야 했던 비련의 인물이었다. 까닭에 그의 파란 중첩했던 후반생은 우리 민족사에서 근대로 획기 되어지는 19세기 말엽의 혼란한 정계와 참담한 시련이 그대로 부각된 것이라 하겠다.

<검박호학의 가풍>
김홍집(초명 굉집)은 1842년(헌종8년) 7월6일 경은부원군 김주신을 5대조로 하는 이름난 척족가문에서 참판영작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를 경능, 호를 도원 또는 이정학제라고 도 했던 그는 가문의 영화에도 불구하고 검박호학 하여온 선비의 가풍속에서 알차게 자라났다.
그리하여 1867년(고종4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등과 하였을 때는 남달리 근면하고도 정중한 인품과 착실하고도 총명한 재질을 지닌 청년 관리로서 장래가 크게 촉망되어졌다.

<등과 뒤이어 난국>
그러나 이러한 그의 인품과 재질과 신망은 그의 등과 와 때를 같이하여 닥쳐 온 외세의 거센 물결로 인하여 그로 하여금 파란중첩 했던 난국을 두 어깨에 짊어진 채 고심 참담 하는 역정을 걷게 하였으니, 이 숙명적인 행로는 병자수호조약의 체결에서 비롯되었다.
이른바 명치유신을 통하여 근대적인 체제를 이룩한 일제는 일찍부터 국력의 신장을 꾀하고자 대한경략을 기도하였었다.
그러나 불·미 양국과의 무력 충돌을 감내(병인·신미양요)하면서까지 강력하게 추진시켰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쇄국책으로 그 뜻을 쉽사리 이루지 못하여 오다가, 이하응의 하야 (1873년 10월)를 계기로 드디어 침략의 마수를 펴기 시작하였다.
1875년 8윌, 서울의 문턱인 강화도 수역에 까지 군함 운양호를 침투시켜 교전을 유발케 한 일제는 곧 이 사건의 구명을 빙자한 사절을 일방적으로 파견하고 수교 통상을 강요하여 왔던 것이다.

<척족개국 무정견>
이러한 일제의 적반하장 격인 태도와 요구에 대하여 조야 에서는 척왜의 논의가 크게 비등하였으나 유약하였던 민비의 척족정권은 국제정세로 보아 조만간 개국이 불가피하리라는 청국(주로 이홍장)의 의견과 일부 개국론자의 주장에 따라 거의 무정견하게 개국 할 것을 결정하고 말았으니, 이에는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일사의 누차에 걸친 협박을 모면하고 또한 반대파인 대원군의 쇄국책을 기피함으로써 자체의 정권을 강화시켜 보겠다는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무수정 조약체결>
그리하여 불과 수차의 회담 끝에 일사가 미리 준비하여 온 한·일 수호조규는 거의 무수정체결 되었는바(1876년 2월 3일 조인)이것이 이른바 병자수호조약 또는 강화도조약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 오랫동안 쇄국을 견지하여 왔던 조선 왕조는 이로써 그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과 국교를 수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개국에 있기 보다 전문 12개조로 된 한·일 수호조규가 지니는 기만적인 내용에 있었다.

<총검 앞세워 강요>
견사에 앞서 치밀한 협상 계획을 세운 일제는 침략의 발판을 확보하고자 개척장관 흑전청륭을 전권대신으로, 외교통인 정상향을 부관으로 택견하는 동시에 수 척의 군함과 천에 가까운 군사를 수행시켜 무방비 상태에 있는 조선정부를 함포와 총검으로 협박하는 한편 한 걸음 앞선 국제외교의 지식과 경험으로 기만하여 이 조규를 완전히 불평등한 조약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문박·대구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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