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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백신의 시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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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예방의학 잡지의 표지에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예방으로 질병극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현대의학의 성공신화가 바로 백신이다. 물론, 백신이 새롭거나 획기적인 것으로 인식되지는 않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 집권시절 외과의사인 에드워드 제너가 우두에 감염된 젓 짜는 여성 환자의 고름을 이용해 천연두를 예방하던 때부터 백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20세기말,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예방백신을 통해 천연두나 볼거리, 홍역, 풍진, 백일해, 디프테리아, 소아마비 같은 끔찍한 역병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제 기능을 너무 잘 해 낸 탓에, 특정세포만 죽이는 스마트 약물(smart drugs)과 최첨단 의학기술로 무장된 21세기 의학계의 시각에서 보면, 백신은 별나고 구닥다리 같이 느껴지는 데다, 심지어 생물의학이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9?11 테러사건과 탄저균 공격이 발생한 이후 급변했다. 급작스럽게 백신문제가 화두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미 정부당국은 테러위협을 받고 나서야 허둥지둥 천연두 예방백신을 비축하기 시작했고 지난 수년간 법적?의학적 문제로 난관에 봉착했었던 탄저병 백신문제가 다시 신속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생화학테러에 대한 이러한 방어대책은 백신의 부활을 설명해주는 단편적인 모습일 뿐이다. 오랫동안 정체되었던 면역학, 바이러스학, 유전학 분야는 지난 수년간 괄목할만한 기술진전으로 재도약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백신이 웬만한 과제들은 모두 해결해 냄에 따라, 이 분야 전문가들은 더욱 어려운 숙제를 해결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암 같은 난치병 치료나,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 속에 침전된 단백질을 제거하는 것들이다. 또 심지어 심장병 치료까지 말이다.

“백신연구의 신시대가 열렸다”고 미국의 국립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Allergy and Infectious Diseases ; NIAID)의 게리 나벨 소장은 말한다. "이 분야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는 매우 흥분되는 시기다“

이런 전환기를 맞게 된 중요한 계기는 백신연구에서 커다란 실패를 맛보면서다. 에이즈가 확산되기 시작한 지난 1980년대, 의학자들은 소아마비나 수두처럼 의도적으로 독성을 약화시킨 병원균을 환자의 몸에 투여해 면역체계를 훈련시킴으로써 실제 감염을 예방시키는 방법을 시도했다. 이 과정이 분자수준에서 어떻게 진행되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에이즈가 출연하기 전까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이즈 바이러스는 너무도 정교하기 때문에 이런 허술한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했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의학자들이 생각지 못한 점을 이용, 면역세포 내로 숨어버리거나, 신체 방어시스템이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로 재빨리 변종을 만들어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단히 복잡한 인간의 면역체계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그 작용의 비밀을 캐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성과를 거두었다. 10여 년간의 연구덕택에 이제 인간의 면역체계가 전구처럼 켜지고 꺼지는 단순한 시스템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학자들이 밝혀낸 것이다. 이들은 인간의 면역체계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또는 기생물질의 침입 시 그 위험수준에 상응하는 방어무기로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의 면역체계를 복잡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런 섬세한 면역시스템의 조절능력 때문인데, 백신기술의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복잡함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간단한 면역반응으로는 모기에 물렸을 때나 알레르기 반응 시 나타나는 염증반응이 있다.

우리의 면역체계는 곤충에게 물리는 단순한 경우에는 별도의 훈련을 받지 않은 세포군단(cell troops)을 이용한다. 백혈구나 호중구(neutrophils), 그리고 비만세포(mast cell)라고 하는 세포들이 혈액 속을 돌아다니며 낯선 화학물질의 침입을 탐지한다. 그리고 발견 즉시, 보병공격처럼 침입물질 주변에 집결하도록 지원요청 신호를 보낸다.

1차 방어선 역할을 하는 이 세포들이 병원균을 당해 내지 못하면, 면역체계는 두 번째 세포군단을 내보낸다. 바로 자연면역계다. 무턱대고 병원균을 죽이는 1차 방어세포들과 달리, 이 세포들은 인플루엔자나 라이노 바이러스(일반감기를 일으키는 세균) 같은 특정 이물질만을 노리도록 생화학 무기로 사전 프로그램 돼 있다.

그러나 1, 2차에 걸친 방어도 충분치 않을 때가 있다. 그럴 경우에는 중무기, 즉 좀 더 특화된 획득면역계가 나설 차례다. 이 면역세포들은 경험을 통해 학습하기 때문에 한번 노출되었던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와 마주치면 인식하게 된다. 한번 수두에 걸리면 다시는 걸리지 않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 정도의 사실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알려진 바다. 오늘날의 백신 전문가들은 이렇게 고도로 조율된 면역체계를 이해하고, 나아가 조절까지 할 수 있는 방법을 밝혀내려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획득면역계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항원의 침입 시 생체 내에 만들어지는 항체로, 이것은 마치 자물쇠에 꼭 맞는 열쇠처럼 바이러스나 세균 표면을 덮고 있는 복합단백질에 맞게 생성된 물질이다. 항원을 인식하는 이 항체가 면역세포를 항원에 잘 연결시켜 줄수록, 면역세포가 병원체에 달라붙어 파괴하는 능력이 그만큼 커진다.

그러나 병원균은 이따금 생물학적인 속임수를 써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함으로써 항체의 공격을 피한다. 이때 획득면역계의 대처방법은 바로 항원제시세포(antigen-presenting cells; 정상물질과 이물질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이러스 항원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피부세포의 항원까지도 잡아서 지나가는 T-세포에 항원을 제시한다)를 이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화학적 위장을 한 병원균에 달라붙어 정체를 벗겨내는 수지상세포도 포함된다. 이렇게 해서 정체가 탄로난 병원체는 킬러 T-세포에 의해 파괴된다. 킬러 T-세포의 역할은 나쁜 병원균을 잡아 제거하는 것이다. 수지상세포가 분비한 사이토킨이라고 하는 화학물질의 신호로 활성화된 킬러 T-세포는 감염부위로 결집한다.

이러한 과정 전체가 마치 고난도 훈련을 받은 군대나, 나벨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음악적인 협연과 같다. 면역시스템이 대부분 경우에는 잘 작동하지만, 몇몇 질병에 대해선 추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말 그대로 면역체계의 오케스트라다. “각 면역계가 정확한 순서로 반응하지 않거나 제대로 조화되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된다”고 나벨이 말했다.

면역체계가 반응하기 전 이미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성 질병이 겉잡을 수 없이 진행되는 경우가 그러한 예다. 바로 이때가 백신이 등장하는 순서다. 나벨 박사는 “백신의 임무는 이 전문화된 세포들에게 침입한 병원균이 위험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과 면역체계가 그 병원균을 처음 인식하는 것보다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는 결핵이나 말라리아, 에이즈같이 인체에 치명적인 질병이 백신을 이용할 수 없었는데, 이들 질병에 대한 자연면역성(自然免疫性) 모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학자들은 에드워드 제너의 경우처럼 자연에서 백신을 도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양한 면역세포가 제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면역시스템 중 어느 부분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으며 가장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밝혀냄에 따라 이 같은 사실은 변하고 있다. 에이즈 바이러스를 예로 들어 보자. 이 바이러스는 변종을 만들어내는 속도가 엄청 빠르기 때문에, 획득면역계가 이 바이러스를 파악하고 달라붙기가 무섭게 표면에 새로운 항원을 만들어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그러나 NIAID에서 최초로 효과를 입증한 방법을 이용해 바이러스가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면역시스템의 방어막을 피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지 모른다. “프라임 부스트(prime-boost) 접근법"라고 알려진 이 방법은 실제 백신으로 에이즈 바이러스를 공격하기 전, 면역체계가 바이러스에 익숙해지도록 훈련시킨다.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벨 박사가 처음으로 동물실험에서 증명한 것처럼, 경계태세를 유지하도록 에이즈 바이러스의 외부코팅에 있는 DNA 조각을 이용해 이 백신을 만든다.

과거에는 이 방법이 인간에게 효과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다른 포유동물들과는 달리 우리의 면역체계가 DNA가 보내는 신호만으로는 충분한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DNA의 빈약한 신호력을 보강하기 위해, 바이러스 항원을 첨가한 약화된 감기바이러스를 접종하면 며칠 후 면역시스템이 활성화된다는 것이 나벨 연구진의 이론이다.

이러한 방법이 에이즈에도 효과가 있는지 판단하기는 아직 이른 시점이지만, 이미 인체에 치명적인 다른 바이러스에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에볼라 바이러스로 인한 희생자의 규모는 에이즈보다는 훨씬 적은 편이지만, 그 살상능력은 엄청나다. 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나 백신이 없는 상황이지만, 나벨그룹은 최근 실험에서 DNA 프라이밍(DNA priming)으로 원숭이를 에볼라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앞으로 십여 년 이내에는 환자에게 사용 가능한 에이즈 백신의 임상실험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가능하게 되면 나벨을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밝혀낸 백신성능 강화법을 모두 사용해볼 계획이다. 가령, 사이토킨을 백신과 혼합하여 에이즈 바이러스를 파괴할 수 있는 킬러 T-세포를 추가로 결집시키는 방법이 있다. 또한 바이러스 DNA의 프라이밍과 함께 약간의 전기 충격을 가해 DNA의 면역반응 유도 능력을 강화하는 방법도 있다. 또 핵산에 최대의 충격을 가하기 위해 유전자총으로 DNA를 직접 면역세포에 주입하는 방법도 있다.

앞으로 이 유전자총을 이용해 바이러스 DNA를 직접 삽입하는 방식이 전통적인 백신투여방법을 대체할 것이라는 것이 이 총 개발자의 생각이다. 달라스 텍사스대학 종합병원(CUTSM)의 생물의학발명센터(Center for Biomedical Inventions)소장인 스테픈 존스톤 박사는 병원균이 맨 처음 숙주의 세포 속으로 침입할 때 정확히 어떤 유전자가 발현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지놈배열과 관련된 신기술을 이용하고 있다.

존스톤 박사는 마이크로어레이 기술(일명 DNA칩)을 사용하여 그 유전자를 파악한 다음, 병원체의 지놈에서 유전자의 일부를 자르거나 유전자들이 만들어낸 단백질을 이용해 면역반응을 유도하는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이런 방법으로 말라리아나 결핵 백신의 개발도 가능할 수 있다. 여태껏 예방백신에 끄떡없던 질병들을 정복할 수 있게 된다면 무척 감동적이겠지만,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질병들까지라면 이보다 더 획기적인 사건은 없을 것이다.

그 한 가지 예가 바로 심장병 백신이다. 몇 년 전만해도 이 질병과 관련된 면역시스템을 파악한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하지만 지방질로 된 콜레스테롤이 동맥벽에 쌓이는 현상은 제일 먼저 세균성 염증증상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면역반응은 동맥이 콜레스테롤에 쉽게 손상되도록 만든다. 백신으로 초기감염이나 염증반응을 억제함으로써 심장질환으로의 진행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믿고 있다.

백신예방이나 백신치료를 기대하기가 가장 어려운 병이 바로 암이다. 왜냐하면 암은 악성인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감염과는 아무런 상관없기 때문이다. 인체에 침입한 병원균과는 달리 암세포는 전혀 낯선 이물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역체계가 암세포를 공격하도록 훈련시키는 방법을 밝혀내는 중이다. 예를 들어, 캔백신(CanVaxin)은 심한 피부암 형태인 흑색종 예방백신으로, 세 명의 환자에게서 채집한 암세포주로 만든 이 약에는 면역체계가 인식할 있도록 무력화시킨 암 항원 20가지 이상이 들어있다.

캔서백스(CancerVax)社의 임상연구담당 부회장 가이 개먼 박사는 “우리는 대다수 환자들이 면역반응을 보일 뿐 아니라, 그 반응의 정도가 강할수록 환자의 생존기간이 길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암종양 제거수술을 받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초기 임상실험을 한 결과, 이 백신을 접종한 사람들이 접종받지 않은 환자들에 비해 생존기간이 두 배 가량 길었다. 이 업체 연구진들은 백신의 효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사이토킨을 첨가한 캔백신을 이용해 화학치료로 면역체계가 손상된 환자의 면역반응을 활성화시키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한편, 캐나다 코릭사(Corixa)社에서 멜락신(Melacine)이라는 흑색종 백신의 효능을 테스트중인데, 이 백신은 화학치료와 맘먹을 정도로 종양을 축소시키는 효과가 있으면서도 부작용은 적은 편이다.

현재 이 약품은 미국에서 시험 중이다. 환자 개개인에게서 채집한 성분으로, 환자의 상태에 맞는 백신을 만들어야하는 복잡한 환경에서도 초기 임상실험에 성공함에 따라 전문가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한편, 2001년 초, 스탠포드 대학 소속 의학자들이 여섯 명 정도의 환자에게서 진행형 결장암이나 폐암의 종양이 줄어들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진들은 실험대상 환자에게서 채집한 수지상돌기 세포를 결장암 종양이나 폐암 종양에서 발견된 단백질과 혼합하여 백신을 만든 다음, 다시 환자의 몸속에 투여했다. “이 백신의 성능을 강화하고, 초기단계에서 실험하며, 나아가 예방까지 가능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라고 이 실험을 책임지고 있는 로렌스 펑 박사가 밝혔다.

이것은 분명 시작에 불과하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의학은 수천년동안 인류를 괴롭혔던 말라리아나 결핵, 에이즈 같은 치명적인 질병을 다스릴 백신을 찾지 못해 절망에 빠졌다. 앞에서 언급된 획기적인 예방법의 효과가 곧 증명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엔 아직 무리인 것 같다.

지금 백신의 시대를 선포하기엔 너무 빠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 개발 중인 백신 중에는 아직까지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 못한 것도 있다. 그러나 의학자들은 중요한 교훈을 깨달았고, 그 교훈은 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분명 긍정적인 것이다. 백신의 한계를 지적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일 가능성이 높고, 또 예상보다 빨리 그 사실이 판명된다.

Michael D. Lemonick and Alice Park (Time) / 안선주 (JO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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