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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姓 쓰고 원 테두리…인감 내맡기는 셈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13호 08면

중소기업 사장인 최모(73)씨는 몇 년 전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그때 자신도 모르게 은행으로부터 20억원의 대출이 이뤄졌던 것이다. 그의 비서였던 김모(56)씨가 최씨 소유 건물을 담보로 대출 사기를 저지른 뒤 돈을 들고 해외로 도주했던 것이다. 최씨는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대출 신청서에 적힌 최씨 서명이 그의 자필이라는 감정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김씨가 최씨 서명을 위조했던 것이다. 최씨 건강이 안 좋아진 뒤부터 김씨는 여러 해 동안 회사 서류에 대신 결재해 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최씨 서명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결국 2심에서 최 사장은 승소했다. 그가 건강 악화로 심하게 손을 떠는 증세(수전증)가 있어 대출신청서에 나타난 것처럼 반듯하게 서명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인정된 것이다. 김씨는 나중에 체포됐다. 최씨는 “내가 봐도 김씨가 쓴 서명이 내 것보다 더 진짜 같다”고 혀를 내둘렀다. 경기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서명 위·변조를 통한 대출 사기 등이 크게 늘고 있다.

계약서에 쓰는 서명 위·변조 판친다는데…

해상도 낮은 전자서명도 문제 소지
각종 계약이나 거래에서 인감 대신 서명을 사용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정부는 1914년 일제가 도입한 인감 제도를 글로벌 트렌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명으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최씨와 같이 서명 위ㆍ변조로 피해를 당하는 사례도 함께 늘어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따르면 2008년부터 매년 3000건 이상의 필적감정 의뢰가 들어오고 있다.
서명은 사람마다 필체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인 여부를 쉽게 가리는 수단이 된다. 그러나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글은 직선 서체 위주여서 모방하기가 쉽다고 한다. 필적감정 전문가인 국제법과학감정연구소 이희일 소장은 “일반적으로 영문 필기체 같은 곡선체가 위조가 어렵다. 한글의 경우 주로 직선으로 구성돼 있어 상대적으로 위·변조가 용이하다”고 말했다. 개인 사인을 전문적으로 디자인하는 굿싸인의 최귀성 대표는 “2시간 정도 연습하면 어지간한 한글 서명은 거의 똑같이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서명 도용 논란은 금융권에서 주로 일어난다. 훔치거나 주운 신용카드를 사용하기 위해 남의 서명을 모방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 보험업계에서도 부쩍 늘고 있다. 보험 계약 때 보험 가입자의 자필 서명을 의무적으로 받으면서다. 중소기업 사장인 박모(60)씨는 2010년 한 보험사의 퇴직연금 상품에 가입한 뒤 매달 100만원씩을 꼬박꼬박 납입했다. 지난해 말 직원 한 명이 회사를 그만두자 보험사에 연금 지급을 요청했다. 그러나 보험사는 박씨가 계약한 상품이 퇴직연금이 아니라 저축보험이었다며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감정 결과 청약서의 박씨 서명은 박씨 필적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보험설계사가 박씨 의사와 상관없이 저축보험에 가입한 것이었다.

김모(65ㆍ여)씨의 경우는 정반대의 케이스다. 김씨의 남편은 2008년 장기저축보험을 계약했지만 지난해 사망했다. 김씨는 남편이 저축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약서의 서명은 김씨 남편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가 보험을 중도 해지하면 원금의 일부만 받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최근 경기불황으로 보험 해약이 늘어나면서 서명 관련 분쟁도 증가했다”며 “결국 보험사로부터 실적 부진 압박에 시달린 보험설계사나 보험금 납입이 부담스러운 가입자가 주로 위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험업계가 녹색경영을 한다며 지난해 도입한 전자서명이 문제를 키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자서명은 보험사로부터 청약서 대신 태블릿PC에 서명을 받는 방법이다. 그런데 금융위원회는 전자서명의 해상도를 300DPI(Dots Per Inchㆍ인치당 점의 개수) 이상으로 정했다. 해상도를 높일수록 비용이 늘어나는 점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이희일 소장은 “300DPI 수준은 조금만 확대해도 글씨가 뭉개져 보인다”며 “적어도 800DPI 이상은 돼야 확실하게 감정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중요 계약은 서명·인감·지장 병행을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12월부터 본인 서명사실 확인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본인이 전국 어디서든 읍ㆍ면ㆍ동사무소에 찾아가 서명하면 인감증명서와 동일한 효력을 갖는 제도다. 인감을 만들고 행정기관에 신고하는 게 불편하고, 인감 관련 사고도 많다는 이유에서 도입됐다.

기자가 주민센터에서 본인 서명사실 확인서를 발급받을 때 전자 서명패드에 쓴 정자체 서명(위). 이를 굿싸인 최귀성 대표가 30분 만에 위조했다(아래). 일반인이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하다.

지난 7일 기자는 서울의 한 주민센터에서 본인 서명 사실 확인서를 떼봤다. 홍보가 잘 안 돼 발급 실적이 저조했다. 기자의 확인서가 지난달 27일 이후 첫 발급이라고 했다. 담당 공무원도 발급 절차가 익숙하지 않았는지 여러 번 매뉴얼을 들여다봤다. 그는 “신용카드 결제 사인처럼 흘려서 쓰면 안 된다”고 말했다. 기자는 정자체로 전자서명 패드에 서명을 적었다. 이 서명을 굿싸인의 최귀성 대표가 위조해봤다. 최 대표는 “30분 정도 연습했다. 곡선 부분이 적어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말했다. 얼핏 보니 기자의 서명과 똑같았다. 이희일 소장은 “두 개의 서명을 대조하니 진본에서 ‘ㄹ’의 위치가 위조본보다 상대적으로 뒤에 있는 등 차이가 드러났다. 그러나 일반인이 육안으로 구분하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전자서명 패드의 해상도 역시 300DPI였다.

이에 대해 행정안전부 주민과 김명선 과장은 “본인 서명사실 확인제도는 인감과 달리 국가가 서명을 등록받아 관리하는 제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과장은 “가령 부동산 전세 계약을 할 경우 확인서의 서명이 전세 계약서의 서명과 동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부동산 중개업체 관계자는 “관행상 전세 계약서에도 인감을 찍는다. 확인서의 서명이 전세 계약서의 서명과 다르다면 혼란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행 인감 제도는 계속 유지된다. 행안부는 서명이 어려운 장애인이나 노인을 배려한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 금창호 선임 연구위원은 “지난 정부 때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에서 인감을 서명으로 완전히 대체하는 방안이 논의됐다”며 “그러나 100년 가까이 운영된 상거래 관행을 금세 바꿀 수 없어 인감과 서명 제도가 당분간 공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명이 100%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제언이다. 이희일 소장은 “중요한 계약은 서명, 인감이나 엄지손가락 지장 등 개인을 나타내는 방법을 여러 개 같이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명 제도가 이미 보편화한 외국은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에선 부동산 등기는 서명과 함께 반드시 공증을 받도록 한다. 미국은 요즘 신용카드로 결제할 때 전자인증 제도로 서명을 대신하는 경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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