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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으로 놀았죠, 120개 서체로 춤을 추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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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사람들이 동물 가죽을 들고 춤추는 것, ‘없을 무(無)’자는 여기서 나왔다. 제사장의 춤은 어느새 자기를 잊는다. 심은 전정우의 붓끝에서 태어난 ‘무(無)’다. [사진 서울 예술의전당]

지난 1월 11일 강화도 심은미술관.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 일월영측(日月盈仄)…….’ 종이에 붓이 내달렸다. 오후 2시에 시작해 자정까지, 꼬박 열 시간을 썼다. 열네 폭 종이, 합쳐서 폭 126㎝, 다 쓰고 나니 소주 여섯 병이 뒹굴었다.

 천자문이 뭔가, 1000자 250구 125절에 천문지리와 인간사의 이치를 압축한 서사시다. 그 1000자 중엔 겹치는 게 단 한 자도 없으니, 서체 연구에 이만한 것도 없다.

 서예가 심은(沁隱) 전정우(65)는 문헌으로 접할 수 있는 모든 서체를 이 1000자에 뒤섞었다. 원시그림문자인 갑골문·종정문(鐘鼎文, 중국 주·은나라 때 쇠붙이 따위에 새겨진 글자)부터 노자백서를 거쳐 왕희지체·안진경체·추사체까지…. 이렇게 천자문 120체를 집대성했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8~31일 열리는 ‘심은 전정우: 천자유희(天字遊戱)전’은 그 완성을 알리는 전시다. 전시장 밖 벽에 한 가득 내걸린 천자문은 그가 지난 9년간 하루 15시간씩 꼬박 쓰며 종이에 붓으로 싸웠던 흔적이다. 짐짓 ‘이것은 기본이고, 연습일 뿐’이라며 전시장 안에는 넣지도 않았다.

 전시장엔 천자문 120체를 한 폭에 담은 근작 ‘농필천자문(弄筆天字文)’을 시작으로, 짐승 가죽을 들고 춤추는 사람을 형상화한 문자추상 ‘無’ 시리즈, 손에 손잡은 군중을 형상화한 ‘衆-아름다운 동행’ 시리즈,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 신조형 작품, 법정 스님의 ‘둥근 달 건져 가시오’, 김수환 추기경의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등 한글 서예에 이르기까지 200여 점을 걸었다.

 전씨는 나이 서른아홉에 다니던 대기업에 사표를 냈다. 서예·전각·한문 공부를 한 지 10년 만이었다. 세 가지는 각각 여초 김응현, 구당 여원구, 해오 김관호 선생에게 배웠다. 사직한 그 해 국전 대상을 받은 뒤 서예가 ‘심은’으로 살았다. 졸업한 초등학교가 폐교되자 ‘심은 미술관’으로 만들어 거기 묻혔다.

 거북 껍질이나 소뼈를 지져 그 무늬를 판독하던 시대도 아니다. 목간에 칼로 새기던 때도, 종이에 붓질하던 때도 갔다. 키보드를 치는 시대, 서예는 어디로 가야 할까. 전시는 21세기 서예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한 결과다. 심은은 “내게 글씨는 생명, 살아있음의 증거다. 누구든지 공감하고, 일자무식도 볼 수 있는 서예전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예술의전당 이동국 학예사는 “이 시대 서예는 갑골·종정 같은 원시의 것들을 문자 영상의 시대에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 고민의 결과가 현대미술의 대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료. 02-580-1609.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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