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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家 서영은의 황수정을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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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정! 진실의 자리에 정직하게 서서 위선자들의 얼굴을 응시하라"

탤런트 황수정의 히로뽕 파문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그는 과연 어떤 수준의 사회적 질책을 받아 마땅한가. 프라이버시를 파헤치는 언론의 보도 수위는 어디까지인가. 그는 범죄자인가, 피해자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작가 서영은씨가 황수정과 한국사회의 진실을 촉구하는, 논쟁적 글을 기고했다. 〈편집자〉


'내게 돌을 던져라. 맞겠다.'
오래 전의 일이었다. 재색을 겸비하고 출판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어 인기 정상에 올라 있던 한 여류작가가 간통죄로 피소되었다. 그와 상대남은 구속되어 법정에 섰다.

그때도 물론 매스컴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 사건을 크게 보도했고, 그것은 그가 평소에 누리던 인기의 반대급부로서 아프지만 끌어나가야 할 자기몫이었다. 삶에 대한 성찰이 깊지 못한 일반대중은 한 목소리로 '당신 같은 사회 지도층 인사가 무엇이 부족해 남의 남편을 넘보는가'라고 질책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삶의 진실을 규명하는 소명을 작가정신으로 알고 있었던 문단의 후배·동료들은 간통죄가 사실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의 연애사건에 대해 일단 이해할 수 있다는 암묵적 분위기였다. 사실 정염의 화살이 스스로 눈을 가지지 않은 바에야 날아가 꽂힐 가슴이 기혼인지 미혼인지 어찌 미리 구분하겠는가.


또한 거친 삶의 심해(深海)에 함께 발을 담그고 허우적거리는 인생 동기로서 이런저런 덫이 얼마든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상황을 맞아 자기 진실 앞에 어떤 자세로 임할 것인지, 그것이 더 궁금했다.
검찰의 심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현장에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사실보도에 힘쓰는 기자들의 열성으로 신문지상에 낱낱이 공개되었다.

상대남의 부인이 현장에서 포착한 증거들을 제시해도 그의 대답은 한사코 “아니오”로 일관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누구에게도 진실로 들리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한번씩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올 때마다 그는 점점 더 구차해보였다.

어쨌든, 그의 거짓말은 법의 올가미와 대중의 무자비한 질타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했지만, 자기 삶의 진실의 자리를 회피함으로써 '자기를 속인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문단의 후배·동료들은 그의 손목에 설사 수갑이 채워진다 하더라도 죄인 된 그의 속에서 자기 삶을 창조적 의지로 헤쳐 나가는 자유인이 우뚝 일어서기를 기대했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진실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하게 하는 하나의 일화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의 부조리를 삶으로 항거하며 필생의 역작 장시집(長詩集) '칸토스'를 남긴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의 역동적 인생편린 중 한토막.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에 머무르고 있던 파운드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옹호하고 반미 방송을 주도한 죄로 피사의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미국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의 죄는 반역죄였다. 그가 고국인 미국에 대해 반미 감정을 품게 된 것은 2차대전을 경제전쟁으로 파악한 그의 독특한 시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동기는 미국 유대인의 국제적 고리대금업에 있다고 생각했다.

에즈라 파운드의 죄와 양심


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언도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기 죄를 조금도 부인하지 않았고, 여전히 반유대주의 감정을 속임없이 드러냈다. 법이 자신의 목에 밧줄을 옭아매는 한이 있어도, 민족주의자들이 자신의 노작에 재를 뿌리며 조롱하는 일이 벌어질지라도, 그는 자기 마음의 진실로부터 한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문우들-아치볼드 매클리시·로버트 프로스트·어니스트 헤밍웨이·T. S. 엘리엇 등이 나서서 거짓증언을 함으로써 졸지에 정신병자가 되어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그는 13년 동안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었다. 수감중에도 그는 근신하는 태도를 보이기는커녕 세계에 흩어져 있는 문우들을 병동 안으로 끌어모아 요란한 파티를 열어 병원 관계자들을 난감하게 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삶의 문제다. 삶이란 항상 과정이며 진행중인 거대한 시간이다. 과정으로서의 삶에서는 절대악도, 절대선도 없다. 오늘의 악은 시간의 변전 속에서 내일의 선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파운드가 국가권력의 서슬푸른 단죄에도 당당하게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거대 시간을 사는 자유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자신의 고요함으로 끌어들이고,
기쁨을 추구하고자 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크기를
증명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 파운드의 시 '칸토 XXXⅤI' 중에서


위대한 개인은 다만 현재 또 현재의 절대시간을 살 뿐인 것이다. 그 절대시간 속에서 인간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진실뿐이다. 마약은 절대악이 아니다.
지난해 11월13일 도하 각 일간지들은 히로뽕 투여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한 탤런트에 대한 기사를 앞다투어 보도했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사실보도 수준을 넘어 그 탤런트가 청순한 이미지로 대중을 속여온 것처럼 매도하고, '충격' '분노' '배신' 등의 표현을 써서 강한 적의를 드러냈다.
일부 언론에서는 그 탤런트의 미확인된 사생활까지 폭로하며 독자들의 비이성적 뭇매를 유도하는 분위기까지 풍겼다. 거기에 공중파 방송들도 일제히 가세하여 수의 차림의 그 여성이 수감되는 장면을 9시뉴스 시간에 여과 없이 방영했다.

하지만 '드러난 것'은 한 탤런트의 히로뽕 투여 혐의 사실만이 아니었다. 매스컴 종사자들의 몰염치한 인권유린적 보도행태와 혐의뿐인 피의자를 죄인시하는 검찰의 강압적이고 권위주의적 수사, 선동적인 기사에 쉽게 부화뇌동하는 대중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입(말들)은 정작 한 여성의 히로뽕 투여 혐의보다 더 심각한 죄악으로 보였다.

양식 있는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유죄판결도 나지 않은 혐의자에게 수의를 입힌 것도 의아했으며,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밀치고 당기며 플래시를 터뜨리는 기자들의 입에서 터져나온 경멸조의 반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황수정은 재판 결과에 따라 그 혐의를 벗을 수도 있고, 혐의가 사실로 인정되어 처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본인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그 시련을 자기 성숙의 약으로 삼아 거듭 태어날 수도 있다.

황수정을 희생양으로 삼는 세력은 누구인가


그러나 보도를 빌미로 사건 속의 인물들을 무자비하게 희생양으로 삼는 제도언론의 횡포에는 누가 제동을 걸 것인가.너그럽게 보자면 한 탤런트가 자기 연인과 함께 내실 깊숙한 곳에서 두세번 마약을 투여했다고 해서 그게 무슨 천인공노할 죄라도 된단 말인가. 이 나라가 그 구성원의 행동 하나 하나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만큼 부패도,부정도, 범죄도 없는 깨끗한 나라인가.

밤이면 연예인들을 술자리로 불러내 엽기적 행태를 서슴지 않는 것은 누구이고, 덫에 걸려들기 무섭게 몰매를 치며 질타하는 것은 누구인가. 탤런트의 연기로 그 사람을 인정하기보다 극중인물의 이미지를 실제인물과 혼동해 멋대로 인기몰이를 해온 사람들은 또 누구란 말인가.

황수정이 성숙한 인간으로, 또 연기자로 새출발하기 위해 필히 짚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있다. 그가 지금까지 누려온 인기는 엄밀히 말해 자기의 것이 아니었다. 드라마 '허준' 속에서 '예진아씨'라는 인물의 캐릭터를 만들어낸 작가의 몫이었다.

백화점과 화장품과 건설사의 광고모델이 되어 그가 벌어들인 돈도 기업에서 그 이미지를 차용하는 대가였다. 그는 그저 그 이미지의 옷걸이가 되어 주었을 뿐이었다. 그는 연기와 무관하게 자기에게 쏟아졌던 대중의 관심을 당의정처럼 받아 마신 실수를 뼈아프게 후회해야 한다.

연기자든, 가수든, 언젠가는 인기의 정상에서 내려와야 하는 구차스러운 두려움 때문에 마약에 손을 댈 것이 아니라 자기 노래, 자기 연기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제물로 드릴 각오가 있을 때만 악마와 결탁할 일이다. 이때의 결탁은 인류에게 헌정되는 도전과 자유의 시(詩)가 될 것이다. 바로 그런 시가 보들레르에 의해 씌여진 '인공의 천국'이다. '아시슈의 詩-신인(神人)'의 장에는 다음과 같이 마약이 불러일으키는 환각상태를 묘사해놓고 있다.

'천장에 그려진 그림은, 정교하건, 시시하건, 또는 졸렬한 것이라 할지라도 무시무시한 생기를 띠게 될 것이다. 주막집 벽에 발라진 다시 없이 보잘 것 없는 벽지의 그림도 호화로운 투시화처럼 입체적으로 보일 것이며 찬란한 육체를 가진 님프들은 하늘이며 물보다 더 깊고 맑은 커다란 눈으로 여러분을 바라보고, 선의 굴곡이 실로 명백한 말이 되어 거기에 여러분은 넋의 동요와 욕망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 신비롭고 변하기 쉬운 정신상태는 발전을 거듭하며, 비록 눈 앞의 광경이 아무리 진부한 것이라 할지라도 가지가지의 문제로 가득한 삶의 깊이가 그 광경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나타난다…. 아시슈는 모든 삶 위에 마술적인 와니스로 퍼져가고, 엄숙하게 그것을 물들이고, 그 모든 깊이를 밝혀준다….

선율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여러분의 넋이 느낀 움직임을 나타내고, 소리 하나하나가 말로 변하고, 시정(詩情)은 송두리째 생명을 가진 경전처럼 여러분의 머리 속에 들어온다.'

'오랫동안 아편이나 아시슈에 탐닉한 나머지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습관 탓으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해방되는 데 필요한 기운을 발견할 수 있었던 사람은 나에게는 탈옥수처럼 보인다. 그러한 사람은, 언제나 조심스럽게 유혹을 피하고, 한번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신중한 사람보다 나에게 더 많은 감탄을 자아낸다.'

'나는 이 글의 마지막 장에서 이 위험하고도 감미로운 훈련에 의해 빚어지는 정신적 피해를 규명하고 분석할 참이다. 가벼운 상처밖에 안 받고 이 싸움에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변화무쌍한 프로메테우스의 동굴에서 빠져나온 용사나 지옥의 정복자 오르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흥분성 독약은 '악마'가 한심스러운 인간을 잡아다 노예로 만들기 위해 구사하는 가장 무섭고 가장 확실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악마가 가장 완전히 둔갑한 모양의 하나로까지 생각된다.'

'최고는 없고 의견만 있다'


이쯤 되면 보들레르 이후 마약의 바다로 항해를 떠날 또 다른 율리시즈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듯싶다.
얼마전 팝계의 슈퍼스타 마돈나는 터너예술상의 시상자로 런던 갤러리 시상식장에 나타났다. 터너예술상은 전위작품을 대상으로 수상작을 뽑아 시상해 왔다. 그는 올해의 수상자 마틴 크리드에게 상금과 상장을 수여하는 도중 욕설을 해 생중계하던 TV 채널 4번이 긴급 사과문을 내보냈다고 한다. 마돈나는 그 현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예술가에 대한 시상식이 다소 이상하다. 형식적인 잣대로 예술의 진실함을 평가하려 할 때마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욕설) 모든 작품들이 승자란 것이다. 최고의 무엇이란 없다. 단지 의견만 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시상식이란 것 자체가 우습다.”

이번 황수정 사건은 탤런트에게서 연기보다 외모를 취하고, 외모를 취한 뒤에는 고작 술자리에 불러내 술시중을 들게 하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치졸한 개그다.

우리는 그가 법정에서 자기에게 씌워진 혐의를 벗겨내기 위해 구차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자기 진실의 자리에 정직하게 서서 자기를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 모두가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라는 것을 고발해주기 바란다. 욕설도 좋다. 하지만 그에게서 과연 마돈나 같은 슈퍼스타의 면모를 기대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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