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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코미디언 급부상하자…혼돈의 이탈리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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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탈리아 코미디언 출신 정치인인 베페 그릴로 오성운동(Five Star Movement) 당수가 25일 아내인 파르빈 타지크(오른쪽)와 투표소로 들어가고 있다. [로마 로이터=뉴시스]

이탈리아가 24~25일 치른 총선 결과 카오스적 불확실성(Chaotic Uncertainty)에 직면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돈에 빠졌다는 얘기다. 이탈리아의 재정개혁 후퇴가 유로존 위기를 재점화할 것으로 우려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도 요동치고 있다.

 일단 개혁을 표방하는 중도좌파 민주당이 하원에서 승리하긴 했다. 지지율은 29%대지만 이탈리아 선거법상 1당이 되면 하원 의석 55%를 배분받는다. 그러나 상원에선 어느 정당도 과반을 넘기 힘든 상황이다.

 로이터통신은 26일 이탈리아 정치평론가들의 말을 빌려 “재정위기와 혹독한 경기침체가 기괴한 선거 결과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이탈리아 상·하원은 동등한 입법 권한을 갖고 있다. 상·하원 과반수 확보가 정권 유지의 필요조건이다. 이탈리아 외국은행연합회장인 기도 로사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탈리아는 어느 누구도 다스리기 힘든 나라가 됐다”고 말했다.

 승자는 불투명하지만 패자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바로 거국내각 리더로 긴축과 재정개혁을 주도한 마리오 몬티 총리다. 그는 1차 이탈리아 위기 와중인 2011년 11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아 위기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사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거국내각의 중심축인 베를루스코니가 몬티의 재정긴축에 반대하며 지지를 철회해 버렸기 때문이다. 몬티는 이번 총선에서 9~10%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대신 전직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가 이끄는 오성운동(Five Star Movement)이 급부상했다. 하원에서 무려 25%의 지지를 받았다. 그릴로는 ‘반긴축·반유로’를 표방했다.

 베를루스코니와 그릴로에 대해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긴축이 낳은 극단적 존재들”이라고 논평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성추문 등 온갖 스캔들과 부패에 휘말린 인물이다. 그릴로는 일관된 정강·정책 없이 기존 질서와 세력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유권자들에게 다가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아주 이질적인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긴축 반대엔 한목소리를 냈다”고 전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으면 민주당의 재정개혁을 가로막을 수 있다. 시장이 우려하는 상황이다. 투자자들은 이탈리아 국채를 투매하기 시작했다. 26일 이탈리아 국채 값이 추락하면서 10년 만기 수익률(시장 금리)이 4.8%대로 뛰었다. 지난해 11월 이후 석 달여 만에 최고다. 유럽 주요국 증시는 이날 2% 이상 곤두박질하며 출발했다. 앞서 일본 증시는 2.3% 추락했고, 엔저 흐름에도 급제동이 걸렸다.

 이탈리아 국가 부채는 2조1500억 유로(약 3050조원)에 이른다. 스페인보다는 2배 이상, 그리스보다는 7배 많다. 올해 이탈리아가 갚아야 할 빚만도 4570억 유로에 이른다.

 다만 유럽중앙은행(ECB)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2011년 1차 위기 때와 다른 점이다. 이탈리아 출신인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지난해 앞장서 회원국 국채 매입 길을 터놓았다. 로이터통신은 “이탈리아 국채 투매가 계속되면 드라기가 머니 바주카포를 동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CB도 미국·영국·일본처럼 양적완화(QE)에 나선다는 얘기다. 이번 총선 너머에 한결 치열할 통화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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