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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창간1주년기념논문|작가정신과 역사의식|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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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선진국가라는곳은 반드시 성현들이 많이 사는데가 아닌성 싶다. 그러기에 선진하고 있는 어느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우선 지게와 최신형 자동차라는 도구가 나란히 존재하고있는 사실에 놀란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선진이란 공업이 앞서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공업이 선진하고 있는 나라는 대개 문학이나 예술도 어느 정도는 발달 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한국문학의 발전을 이룩하려면 한국의 산업의 발달이 그 바탕의<하나>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근대가 공업만능의 시대라고 되풀이함은 이미 지루해졌다. 지게와 자동차와 「텔리비젼」과 한국사람이 대부분 살고있는 초가집-우리 초가집은「아프리카」 토인들의 오두막을 비교해보면 반만년의 찬란한 문화민족의 역사가지닌 뜻이 좀달라지리라….
「유럽」문화의 힘이 자연과학에 있고 근대가 중공업을 기둥으로 한 시대라는 하품이나는 원리가 문화나 문학을 생각할 때에도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치면 문제는 좀 심각해져서 나오려던 하품을 다시 가슴속으로 되삼키게된다. 한국에서 근대사회를 전연 찾아 볼수 없다고 단징하기는 어렵다. 이는 서울을 비롯한 도시의 거리를 거닐면 곧 알아차릴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유럽」근대사의 발전단계를 기준으로하여 이나라의 농촌을 살펴 보면 어떠할까? 우리는 적어도 머릿속에서 몇세기를 뒷걸음질쳐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린 다음에야 비로소 눈앞에 펼쳐지는 정경을 이해할수 있을것이다.

<「유사근대」에서의 회의>
그러면 정치와 경제의 부면에서 근대사회의 바탕이 상당한정도 마련될 때까지 예술이나 문학에 종사하는 것을 보류해야 힐 것인가? 혹은 예술과 문학 혹은 학문 그자체도 근대화의 한 요소가 될수 있다고 「믿고」창조하고 연구해야하는가? 그리고 이 둘쨋번의 방향을 알려주는「믿음」이 옳다고 쳐도 하나의 무렷한 의문이 마치 살무사처럼 우리의 가슴을 파고든다.
즉 정치·경제의 뒷받침이 없는 허깨비와같은 유사근대 (서울과 같은 도시를 이해하기 위하여 나는 이렇게 야릇한말을 창조하지않을수없다) 에살며, 어떻게 올바른 근대문학을 빚어낼수 있겠느냐, 이러한 회의. 여기 나타난 몇가지 의문은 실상 현재 우리문학이 대결해야 할 과제의 핵심을 어느정도 암시한다.
현재 우리는 흔히 해방후 20연이 되었다고말한다. 그러나 우리 현대문학의 선각자들은 대개 이민족의 압박시대인 일제때에 그일생의 대부분 혹은 태반을 보낼수밖에 없었다. 근대사회의 싹이 보이자마자 일제하의 쇠사슬에 묶이게된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떠나서 그들을 생각할수는 없다.

<한용운의 절실한 저항감>
세간을 초월하는 방향을 주로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불교의 대선사이면서도 위대한 독립운동자였던 만해 한용운은 근대적 역사의식이 없이는 우러나올수 없는 사회정의를 오히려 매우 절실한 저항감을 통하여 표현하였다. 그는 초탈한 대선사였던 까닭에 도리어 「장황내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깊이 알고 있었다.

<당신을 보았읍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울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거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읍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읍니다.
『민적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대한 격분이 스스르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읍니다.
아아,온갖 윤리·도덕·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줄을 알았읍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의 첫「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읍니다.>
혁명은 경제나 사회구조라는 객관적 조건을 변화시키는것이 목적이므로 개인의 감정을 무시하기 쉽다. 그러나 혁명가의 일면을 지니면서도 대덕이었던 한용운은 <온갖 윤리·도덕·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줄을>알았을뿐아니라, 저넉거리가없는 거지로서 모욕을받고 쫓겨나는 몸이되어 쏟아지는 눈물속에서<당신>을 볼수 있었다. <당신>은 일제의 쇠사슬을 벗어나서 독립한 조국일수도있고 <맹세코 수없이 많은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중생무변서원도)>라는 불교의 이상을 표현했다고 볼수도있다.
그런데 이시를 읽고 우라가 오장까지 찌르르하는 감명을 느끼는것은 무슨 까닭인가?
작자는 저녁거리가없는 거지, 즉 도와주는것도 죄악일 지경인 인간, 혹은 민적도 인권도없어 장군이 능욕하기에 안성마춤인 존재, 다시 말하면<세계내의 존재>혹은 사회적 존재로서 극한상황에 놓여있는 사람과 민족적 이상 (당신) 을 대결시키고 있다. 이는 우리가 감명을받은 하나의 이유가 될것이다.

<인문사 첫장에 잉크칠을>
둘째로 칼과 황금, 즉 권력과 금전이 만능이라는 객관적 사회적 조건을 뚜렷이 의식하고 이러한 조건을 개혁하려는 혁명적 의욕에 불타면서도<쏟아지는 눈물> 혹은<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 혹은<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즉 불교의 이상적 경지에 들어갈까<인간역사의 첫 「페이지」에「잉크」칠을할까 술을 마실까> (이런경우에 술은 우리가 흔히 마시는 술은 결코 아닐것이다-.)
-이런 망설임, 즉 주관적인 인간의 자유와 감정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대한<선택의 비간>의 가치를 과시하고 있기때문일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정치적 경제적 극한상황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오히려 최고도로 드러내고 있는것이 아닌가!
실존철학자들이 흔히 되풀이하는바와같이 인간의 가치와 본질은<선택하는 자유>에 있다. 이렇게 보면, 만해는 일제하의 한국인-거지 인권도 민적도없고 장군이 능욕하는 존재-이러한<한국인의 실존>을 훌륭하게 노래하였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실존이란 독일이나 불란서에만 있는것은 결코 아니다.
만해가 일제하에서 한국인의 항거와 이상과 자유를 노래한뒤 이미 40여년의 세윌이 흘렀다. 그가 쏟아지는 눈물속에서 본 조국은 독립하여 자유로운 민주국가가 되었건만, 우리는 아직도 꽃다운 웃음과 노랫속에서 조국을 보고있지는않다.

<현대문학이 놓인 상황은>
그러면 어떻게 된 셈일까? 현재 우리는 어떤 상황속에서 문학을 하고 있는 것인가? 현존하고있는 어느 시인은 얼마전에 작고한 어느 소세가의 비석 제막의 기회에 생존시의 그를 다음과 같이 추억하고있다.
그저 그런 거지
흰 광목으로 둘린 포장이
벗겨지매
세종로 뒷골목
노벨·아리스 다방거리
대폿집 생각
북어를 뜯으며
싸구려 대포 한잔 두잔 들어가면
세상은 모두 그게 그거,
그저 그런거지
잘 난게 어디 있고 못 난게 어디 있나
아는 놈 어디 있고 모르는 놈 어디 있나
자 말은 정객들에 주고 술이나 들어 드세나
평논이고 뭐이고
어디 하나 똑똑한 거 있나
그저 제 얘기 제 얘기 그게 그거
밤이 깊어도 그저 그게 그거
탓하는 사람도 또 그게 그거지
열두시 사이렌이 나도 그게 그거
아무데서나 누우면 그게 집이지
아침은 오게 마련
바람은 가게 마련
이와 같이 역사적 현실에 대한 무관심은 유능과 무능, 유식과 무식의 차이에 관한 무관심으로 다음에는 문학의식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변하고 있다. 정말<세상은 모두 그게 그거>일까?<인간역사의 첫「페이지」에「잉크」칠을>하려는 만해의 위대한 역사참여의 정신은 어디 갔는가?

<전체적 전망못주는 부분>
나는 우리가 유사근대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고 경제고 문화고 교육이고 간에 아무런<구조>가 없다.
부분을 아무리 보태보아도 하나의<전체라는 전망>을 얻지는 못한다. 증산·수출등의 구호만으로 우리는 민족전체의 전망을 터득하지는 못한다. 근대문화를 담당할 사회적 계층인 중산층은 아직도 자라나지못하고 있다. 근대국가의 한기둥인 의무교육조차도 교실밖으로 삐져 나와서 이나라의 역사상 처음으로 과외라는<암교육시대>를 빚어내고 말았다. 교육은 국민학교 교육부터가<황금을제사지내는 연기>가 되었다.
과외는 모든 가정을 파탄에 몰아넣었다. 국민에게 일을 하라는 위정자들은 어찌하여 국민학교 교육조차 무정부상태에 빠뜨리고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가? 만일 의무교육과 기술교육과「엘리트」교육을 각각 확립할수 있는 정치가가 장차 나타난다면 그는 한국현대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하는 위대한 인물에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나라의 사회가 문화에 하나의「전체적 구조」를 마련해야 할 책임을 지고있다.한국의 현대사와 현대문학사의 첫「페이지」에 「잉크」칠을 하는것도 이와같은 전체적 전망에서 볼때에는 둘이 아니라 하나일 것이다. 만해의 쏟아지는 눈물은 아직 마르지않았다. 「당신」의 한 모습인 우리의 역사적 현실을 바탕으로 문학의 존엄성이 인간의 존엄성과 일치한다는 높은 작가정신이 없는한, 결국 『세상은 모두 그게그거』가 되며, 작가자신이 문학을 맨먼저 부정하고말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은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노력과 능율에서 비로소 그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것이다.

<서울대학교문리대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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