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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창설 67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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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8일은 철도창설 67돌. 1899년(구 한국광무 3년) 9월 18일 제물포(인천)와 노량진(지금의 노량진역과 영등포역의 중간) 사이 33「킬로미터」의 경인철도가 처음으로 트이고 철마가 첫발을 내디딘 날이다. 괴나리봇짐에 조랑말을 타고 한양 길을 오가던 선비들은 이날부터 시커먼 철마에 몸을 담고 단숨에 달릴 수 있어 좋았지만 철도는 탄생하면서부터 기구한 운명 속에서 갖은 역정을 거치며 자라왔다.

<미국인 「모리스」씨 부설권을 일에 매각>
일본·노서아·영국·불란서·독일 등 선진 여러 나라가 극동에 세력을 심으려고 혈안이 되고 우리 나라에 거점을 잡으려고 갖은 술책을 다하고 있던 틈에 철도부설권은 「모리스」라는 미국인 「브로커」에게 허가되었고 「모리스」는 이 부설권을 일본사람에게 팔아버림으로써 우리 철도는 일본사람들에 의해 부설되었다. 대륙침략의 야망을 가진 일본은 이렇게 해서 우리 나라에 세력을 심고 끝내는 만주대륙을 강점하는데 징검다리로 이용하기에 족했다. 어쨌든 이 땅에 철길이 놓일 당시 기관차 4대, 객차 6량, 화차 28량의 경인철도는 1년 뒤인 1900년 7월 한강철교의 준공과 더불어 서울·인천간 41「킬로미터」의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당시의 정거장은 인천·유현·우각동·부평·소사·오류동·영등포·노량진·용산·남대문·서울 등 11개소였다. 이로부터 철도는 일제의 혹사와 2차대전 등으로 시달림을 받았고 8·15의 혼란과 6·25동란 등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67년 동안 무던히 자라온 셈이다.

<당초는 33「킬로」 지금은 약 1백 50배>
당초 33「킬로」의 단선궤도가 지금은 본선(3,502킬로미터), 측선(1,429킬로미터) 합쳐서 4천 9백 31「킬로」. 67년간의 시련 속에서도 1백 50배 가량이나 늘어난 셈이다.(북한은 제외) 지난해에 개통을 본 경인복선을 비롯 각 선로마다 침목은 「콘크리트」나 PC로 바뀌고 증기기관차는 1백% 「디젤」화 해가고 있으며 열흘을 걸려서 왕래를 하던 서울 부산간은 불과 5시간 45분간에 주파하기에 이르렀다. 열차도 수없이 늘어 정기 여객열차가 606개, 화물열차가 669개로 모두 1천2백75개열차가 쉴새없이 전국을 누비고 있다. 이를 끄는 동력차도 4백 79대.
그중 2백 61대가 재래식 증기기관차이고 나머지는 모두 「디젤」이다. 객차는 1천 4백 75량, 화차는 l만 7백 83량이나 된다.

<엄청나게 뛴 운임 1년 수입 1백30억원>
그동안 운임은 얼마나 올랐을까? 67년 전 철도가 탄생할 당시 3등 l「킬로」에 0.94전이던 것이 8·15 해방 당시에는 4.5전이었고 지금은 81전으로 올랐다.
이렇게 해서 철도가 1년 동안 벌어들이는 돈은 1백30억원(65년). 철도는 모든 교통수단의 주종을 이루는 대중교통 수단이면서 아직도 수요량에는 엄청나게 모자란다.

<중앙선에 ctc vhf 시설 갖춰>
중앙선에 CTC(열차집중제어장치), 서울∼부산간에 자동신호기, 각선「레일」의 장대화로 열차의 진동을 작게 하고 달리는 열차와 「콘트롤·타워」간에 무선연락을 할 수 있게 하는 VHF 시설 등을 갖춘다.
이밖에 차량의 대폭 증강으로 여객수송은 65년도에 비해 1백 89%(74억 명), 화물은 1백76%(89억 톤)로 증강된다.

<서울∼인천 운행 30분∼15분 간격>
서울∼인천간의 여객열차의 운행빈도는 지금의 30분 간격에서 15분 간격으로 향상된다. 직통 장거리열차는 모두 지정제도, 입석은 없다.
서울-부산, 서울-목포간의 특급열차는 대폭 증설된다.
화물은 양회·비료·무연탄·유류 별로 전용열차를 운행하고 소하물은 급송열차로 호구수송을 함으로써 수요지점에서 철도수송을 이용할 수 있다. 근거리여행은 자동판매기를 통해 차표를 사게되고 개찰구는 24시간 개방. 모두 화려한 꿈들이나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 <임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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