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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세상탐사] 서로가 서로에게 ‘빅 브러더’인 세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11호 35면

음식점에서 말쑥한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가 다른 자리에서 직장 동료들과 회식을 하는 여자를 쳐다보고 있다. 잠시 후 그는 음식점을 나가려다 말고 여자에게 다가가 명함을 건넨다. 마음에 드니 생각이 있으면 전화하라는 뜻이다.

남자가 음식점을 나간 뒤 여자는 동료들과 스마트폰을 꺼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검색하기 시작한다. 일단 전화번호를 등록해 카카오톡을 찾아낸 뒤 페이스북, 트위터를 차례로 확인해 나간다. 구글링(googling·구글 검색)도 동시에 진행된다. 단 5분 만에 남자의 출신 학교와 경력, 가족, 친구관계, 취미는 물론이고 그가 사는 집 사진까지 튀어나온다.

며칠 전 한 지인이 들려준 목격담이다. 40대 후반인 그는 “20~30대 후배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한 인간의 정체를 순식간에 샅샅이 알아내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며 이렇게 말했다.

“현관에 구두와 운동화가 놓인 모양으로 성격까지 추리해내더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하긴 요즘 젊은 친구들은 소개받은 이성과 마주 앉기 전에 이미 대충은 알고 나간다고 하니까… 첫 만남의 설렘 같은 건 애초에 없는 거지.”

인터넷, 모바일, 페이스북 등으로 물 샐 틈 없이 연결된 ‘하이퍼 커넥션 소사이어티(hyper-connection society·초연결사회)의 단면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가끔 검색 대상이 되는 것 같다. 전화 취재 약속 뒤 만난 이에게 “검색을 해봤더니 이상한 분은 아닌 것 같더라”는 말을 듣기 일쑤다. 인터뷰하러 갔다가 “선입견을 갖기 싫어 구글링하지 않고 나왔다”는 말을 듣고 엉겁결에 “고맙다”고 답한 적도 있다.

주목해야 하는 건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하이퍼’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흥분한, 들뜬’이란 뜻의 하이퍼(hyper)다. 모두들 항상 흥분하고 분노할 준비가 돼 있지 않나 싶다. 문제의 인물이나 발언이 나오면 즉각 융단폭격이 쏟아진다. 자세한 사정이나 내막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일제히 비난하고 한 사람을 벼랑으로 몰아붙인다. 과거에도 금방 달아오르는 ‘냄비 현상’이 있었지만 인터넷이란 확성기를 통해 놀라운 속도로 증폭되고 있다.

예를 들어 판결문은 길고 촘촘한 법 논리로 짜여 있다. 그러나 주요 재판 선고 결과가 인터넷에 뜨면 거두절미된 채 도마 위에 오른다. 담당 재판부의 대법관·판사에겐 ‘권력의 시녀’ ‘철면피’ 같은 자극적이고 감정적인 호칭이 붙고 사진과 신상이 줄줄이 트위터에 올라온다. 판결문 내용은 상관없이 각자의 선호에 따라 결론만 따진다. 정치인이나 기업인, 작가도 다르지 않다. 중요한 건 옳으냐가 아니다. 어느 편이냐다. 우리 편이 아니면 적(敵)일 뿐이다.

때로는 평범한 시민이 피해자가 된다. 공공장소에서 고의든, 실수든 눈살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하면 ‘OO남’ ‘OO녀’에 등극하고 신상털기를 당할 수 있다. 담배꽁초를 거리에 함부로 버리다간 ‘꽁초남’이 될 수도 있다. 지난주엔 배우 박시후가 인터넷 검색어 앞순위에 올랐다. 그가 성폭행 혐의로 고소당한 뒤 고소인으로 지목된 여성에 관한 신상 정보가 무차별적으로 퍼져나갔다. 더 황당한 것은 해당 여성이라며 사진까지 공개된 한 여대생은 사건과 전혀 무관하다는 점이었다.

두 개의 하이퍼가 겹쳐진 곳, 서로가 서로에게 빅 브러더인 세상에선 거친 파도가 무서운 기세로 밀려왔다 밀려가곤 한다. 재일동포 학자인 강상중 도쿄대 교수는 이런 증상을 ‘부드러운 전체주의’라고 부른다. 그 토대는 “목표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개인이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직접 접근형 사회다.

“직접 접근형 사회에서는 고양이의 눈처럼 변하는 여론에 의해 우리의 다양한 가치관이 정해집니다… 분명히 잘못되었지만 모두가 그렇다고 하면 정답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면 이상한 놈이라고 하면서 묵살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

부드러운 전체주의는 사회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끈다. 공공 영역은 점점 유명무실해지고 국가도 “그저 ‘짓궂은 농담’ 같은 존재”가 되고 있다는 게 강 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불안과 좌절 앞에서 각자의 ‘거듭나기’를 통해 다시 시작하기를 제안한다. 한국 사회도 사이버 문화를 어떻게 개선할지, 집단적인 열병을 어떻게 식힐지,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돌아보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출구는 우리 자신이 빅 브러더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데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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