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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 저 천년 은행, 얼마나 많은 중생을 보듬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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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입춘(2월 4일)에 양평 용문사를 찾았다. 간밤에 내린 눈이 경내에 소복이 쌓였다.

나는 용문산 밑자락 덕동이라는 산고랑에서 산다. 가까이 있는 용문산 용문사를 여러 차례 가보았던 영향 탓인지 저녁이면 용문사의 범종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아 문을 열고 나가 마당가를 서성이기도 하고 툇마루 끝에 가 앉아 있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종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마음 저편에서만 울려온다. 나는 그만 작디작은 사람이 되어서 뒤꼍의 싸리꽃이 있는 곳으로 가보기도 한다. 귀로는 들리지 않는 종소리가 언덕바지의 싸리꽃들을 깨워 피워내는 것만 같았다. 그러한 감흥을 나는 다음과 같은 졸속한 시로 옮겨보기도 했었다.

‘한 덩어리의 밥을 찬물에 꺼서 마시고는 어느 절에서 보내는 저녁 종소리를 듣고 있으니 처마 끝의 별도 생계를 잇는 일로 나온 듯 거룩해지고 뒤란 언덕에 보랏빛 싸리꽃들 핀 까닭의 하나쯤은 알 듯도 해요// 종소리 그치면 흰 발자국을 내며 개울가로 나가 손 씻고 낯 씻고 내가 저지른 죄를 펼치고 가슴 아픈 일들을 펼치고 분노를 펼치고 또 사랑을 펼쳐요 하여 싸리꽃들 모여 핀 까닭의 다른 하나를 알아내곤 해요’(싸리꽃들 모여 핀 까닭 하나를)

용문사 대웅전은 아담한 규모다. 특이하게 창살에 사슴과 온갖 꽃이 화려하게 조각돼 있다. 수령이 1100년으로 추정되는 용문사 은행나무(사진 위), 마치 다섯그루의 나무가 한데 합쳐져 자라난 것 같은 모양이다(아래).

내가 사는 자리에서 개울물과 나란히 길은 내려간다. 그의 형제자매나 된 듯 물소리를 따라 내려가면 용문사에서 내려오는 큰물을 만난다. 내가 용문사로 갈 때면 만나는 그 물의 빛깔과 규모와 콸콸대며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하곤 한다. 마음이 막히면 큰 장소를 그리워하지 않던가. 작은 개울가의 생을 털어내고 좀 더 크고 무애한 물건이 되고 싶지 않던가.

얼마 전 내린 큰 봄눈이 아직 녹지 않은 영내로 들어선다. 다음과 같은 시가 길가 돌에 새겨져 있다.

용문사로 돌아오는 길에 눈을 만나

(回龍門寺途中遇雪有作)

봄바람이 눈을 뿌려 옷깃을 적시는데

(春風吹雪欲沾衣)

여윈 말을 채찍질하여 산허리에 오르네

깊은 골짝 층층 구름 옛길 희미하고

(絶壑層雲迷舊路)

맑은 풍경소리 찾아가니 절문이 보이는구나

(細尋淸磬認禪扉)

용문사 주지 호산스님(왼쪽)과 장석남 시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사진 4).

조선 중기 조광조(1482~1519)의 문인 조욱(1498~1557)이란 분의 시다 (사진4) . 내가 사는 덕동(德洞) 골짜기 입구에 있는 세심정(洗心亭)이란 정자의 주인인데 이곳 평양 조씨의 입향조다. 동네 어른을 만난 듯 반가웠다. 마침 이 시처럼 나는 봄눈이 깊이 쌓인 산을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조욱 선생은 또 무슨 일이 있어서 길도 희미한 골짜기를 여윈 말을 몰아 올라갔던 것인가.

용문사 최대의 명물은 은행나무다. 처음 이 나무 앞에 섰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천 년도 더 전에 났다고 하니, 신라인도 고구려인도 보았을 나무다. 호란(胡亂)도 왜란(倭亂)도 수없이 겪었을 테고, 한말에는 이 고장 의병들의 기개 푸르고도 서글픈 어깨도 기대어 주었을 것이다. 한국전쟁도 겪었을 것이다. 전쟁의 명분도 모르는 젊은 병사의 눈을 씻어 주었을 것이다. 우람하기는 용문산과 맞먹고 적적하기는 그 어떤 죽음과도 대적할 만한 형세로 서 있은 지 천 년! 밤이면 뜨는 별도 이 나무를 알아보고 유난한 빛을 발할 것만 같다.

이 나무는 세속적 관점으로 보아도 1조원이 넘는 가치를 갖는다고 한다. 하긴 이 나무가 천 년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중생을 이 절로 불러들였으며 또 그 마음들을 위로했을 것이며 또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숨결들을 모아들일 것인가. 고개 들어 묵상에 들 수밖에 없는 이 신령한 나무 아래에 서면 과연 명성 그대로 가슴 깊이 메아리 한 줄기가 스미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젠가 용문사 대웅전 앞 사천왕문이 불타고 나서는 이 나무가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한 채의 신전인 것이다. 거기 사는 바람들, 새들, 이야기들은 또 어떤가. 가을이면 물들어 떨어지는 부지기수의 잎들은 수많은 고대(古代)로부터의 이야기들을 소곤거리는 것처럼 느꼈었다.

이즈음엔 내게 새로운 명당이 하나 생겼으니 바로 템플스테이 명상치유센터 처마 아래의 툇마루다. 나는 한참씩 그 자리에 앉아 앞 능선의 흥겹고 깨끗한 춤사위를 구경한다. 어깨며 무릎 아래로는 햇빛이 한 섬씩 쏟아지는 자리다. 비가 오는 날은 빗방울 소리를 들으러 이 자리에 또 올 생각이다. 마침 문 한 짝이 저절로 열려 있어서 지나는 바람결에 좌우로 닫혔다가 열리고 또 열리다가 닫힌다. 저절로 되는 일, 저절로 되는 일, 저절로 되는 일, 저절로, 저절로, 절로, 절로…. 이런 소리를 내며 여닫힌다. 지극히 아름다운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 나는 혹시 이 용문사 이 처마 아래에 저절로 와서 앉아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자리가 기쁘다.

계곡의 물소리가 참으로 낭랑한 목청으로 경(經)을 읽어대는 다실의 창변에서 주지 호산 스님과 같이했다. “여기가 관광지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조금 더 문화와 자연과 수행처의 역할을 조화롭게 할 필요가 있어서 우선 주차장에서부터 경내로 들어오는 길에 차량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긴급한 일이 아니면 차량은 통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올라오는 길에 물길을 만들어 지루하지 않게 하고 전기선을 지중화했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단순히 즐기는 곳에서 생각하고 치유하는 곳으로, 은행나무도 단순히 천연기념물 몇 호가 아니라 우리들의 생의 호흡을 크고 길게 느낄 수 있는 명상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합니다. 그렇게 생각이 깊어져야만 우리 절이 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용문사 땅이 200만 평이 됩니다. 그 땅을 있는 그대로 지키는 것만으로 용문사의 역할은 큽니다. 만약 그것이 세속의 소유가 된다고 상상해 보시면 알 겁니다. 이미 다 개발되어 우리들이 쉴 자리는 사라지고 말았겠죠. 무슨 종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러한 보이지 않는 역할이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스님의 말씀에 나는 그 유명하다는 용문산 산나물 한 꾸러미를 선물받은 느낌이다. 육식으로 탁한 몸뚱이 탁한 정신에게 향긋한 산나물은 얼마나 빛나는 상징인가.

내려오는 길에 보니 지난번 큰눈에 여러 소나무 가지들이 찢어져 있다. 저절로 그리 된 것이니 안타까워할 것 없고 흉할 것 없다. 깊은 밤, 수천 근의 눈을 이고 섰다가 지나는 바람에 ‘한소식’ 한 듯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꺾어져 내리는 나뭇가지를 생각하니 장쾌하다. 어느 날 나도 튀미한 정신을 우지끈 꺾어 잘라버리고 상큼한 자유의 세계로 홀연 입장하고 싶은 것이다.

 글=장석남(시인),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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