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하철참사 기관사, 5년 복역 뒤 출소해

중앙일보

입력 2013.02.18 01:22

업데이트 2013.02.18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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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대구 중앙로 지하철역사 한 편에 있는 통곡의 벽(사진 왼쪽). 지난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참사 당시 화마가 휩쓸고 간 흔적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차단벽으로 가려진 통곡의 벽 옆 일반통로로 17일 오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53분. 대구 중앙로역에 정차한 전동차에서 불이 났다. 이 불로 192명이 숨지고, 151명이 부상당했다. ‘대구지하철 참사’가 벌어진 지 꼭 10년이 흘렀다. 사고 관련자들은 그동안 어떤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까. 중앙일보 취재진은 12~14일 대구를 찾아 사고 당시 기관사와 유가족·부상자 등을 만났다.

 #“평생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

 “2008년에 출소한 뒤 희생자들의 유골이 묻힌 곳(안전테마파크)에 다녀왔습니다. (희생자들에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동차에 대해선 누구보다 자신 있었지만, 막상 화재가 나니 아무 소용이 없더군요. 지금도 대구지하철 화재 얘기만 나오면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사고 이후 가족들과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평생 그날 일을 입에 올리지 않을 겁니다.”

 대구지하철 화재 당시 전동차를 운전했던 기관사 최상열(49)씨. 사고 당시 최씨가 운행한 1080호 전동차에서만 142명(전체 사망자의 74%)이 숨졌다. 방화에 의한 사고였지만, 최씨는 안전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은 과실로 법원에서 금고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2008년 초 만기 출소한 뒤 외부와 일절 연락을 끊은 채 살았다. 취재진은 지난 13일 밤 대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최씨를 만났다. 그는 “화재 사고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다시는 전동차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고 당일 오전 9시56분, 그는 1080호 전동차를 운전해 대구지하철 중앙로역에 들어섰다. 3분 전 반대편 철로에 도착한 1079호 전동차에서 화재가 발생한 뒤였다. 이 전동차 1호 객차에 방화범 김대한(당시 57세, 2004년 복역 중 사망)씨가 불을 지른 것이다. 불길은 순식간에 최씨의 전동차에 옮겨 붙었다. 최씨가 긴급 조치를 취했으나, 전원이 끊긴 전동차는 꿈쩍하지 않았다.

 “건너편 전동차(1079호)에 불이 붙은 걸 전혀 못 봤습니다. 연기가 자욱하기에 승강장 쓰레기통 같은 데서 불이 났나 보다 했습니다.” 최씨는 “지하철 전동차는 불연재를 사용해 절대로 불이 붙지 않는다고 배웠기 때문에 전동차에 화재가 났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실제 당시 사고 처리 과정에서 대구지하철에 가연재가 포함된 불량 내장재가 사용된 사실이 드러났다.

 #“2월만 다가오면 고통 깊어져”

 “안 돼! 안 돼!”

 딸은 이 외마디만 가족에게 남긴 채 화마(火魔) 속에서 스러졌다. 2003년 2월 대구지하철 화재로 숨진 고 이현진(당시 19세) 양. 대구외고를 졸업한 이양은 서울대 사회과학계열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아버지 이달식(54·대구시청 경제정책과 사무관)씨에게는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이씨는 18일 가족과 함께 딸이 잠든 경북 의성군 묘역에 간다. 이양의 동상과 추모비가 있는 곳이다. 그는 “10년이 지났지만 2월만 다가오면 고통이 깊어진다”며 “2월이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지난 10년간 유족보상금 4억여원으로 각종 기부를 해왔다. “사회 환원을 통해 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2004년 초 딸의 이름을 딴 ‘작은 시지프 이현진 장학회’를 세워 대구외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또 딸이 입학할 예정이었던 서울대 사회과학대에 도서기금으로 2000만원을 내놨다. 이씨는 “얼마 전 딸의 사진을 집에서 치웠다”며 “힘들지만 이제 그만 딸을 놓아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대구=정강현·이정봉·정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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