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훈범의 세상탐사] 권력은 힘이 아니라 짐이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10호 31면

교황이 사임한다는 소식에 떠오른 얼굴은 교황 아닌 영국 여왕이었다. 기력이 쇠해 교회 일을 보기 어렵다는 베네딕토 16세보다 한 살 더 많은 엘리자베스 2세다. 그런데도 교황의 지친 표정이 그녀에겐 없다. 여왕이라 어찌 인상 쓸 일이 없겠냐마는, 미소 가득한 얼굴과 원기 넘치는 몸가짐은 결코 87세 할머니의 것이 아니다. 65년의 삶 중 61년을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있는 왕세자의 조바심 때문일까, 오히려 아들 찰스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더 위 연배로 보일 정도다.

맞다. 그게 어찌 나이 문제겠나. 그보다는 짊어진 등짐의 무게가 스스로 감당할 만한 건지 아니면 위태롭게 버거운 건지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현실적 권력인 교황의 짐은 상징적 권력인 영국 여왕의 짐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겁다. 12억 가톨릭 신도의 사표(師表) 노릇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거기에 피임, 낙태, 동성애 같은 합의 어렵고 해결 난망한 짐들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을 터다.

그렇다고 꼭 물리적인 무게만 중력을 갖는 게 아니다. 영국 여왕처럼 상징적인 권력인 아키히토 일왕은 79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상당히 지쳐 보인다. 오죽하면 둘째 왕자가 이미 몇 해 전 “왕도 정년퇴직이 필요하다”고 제언하는 불경을 무릅썼을까.

종신 군주의 짐은 기꺼울 수도 있고 고단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것은 상징적 군주 개인의 운명일 뿐이다. 기약 없이 늙어가는 찰스가 딱할 수도 있고, 과로로 몸살 앓는 아키히토가 안타까울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거기까지란 말이다.

하지만 선거로 뽑힌 현실 정치권력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흔히 권력자들이 그것을 짐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혼자의 짐도 아닌, 조직이나 국가 구성원 모두가 맡겨놓은 책임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짐이 아닌 힘이라 생각한다. 그것도 구성원들이 하나로 모아서 넘겨준 힘인 줄 착각한다.

모름지기 권력은 ‘절대반지’와 같다. 힘이 세질수록 중압감도 따라 커진다. 깜냥이 안 되면 자칫 골룸이 될 걸 각오해야 하는 그런 절대반지다. 『반지의 제왕』의 톨킨이 처음 경고를 발한 게 아니다. 훨씬 앞서 플라톤이 먼저였다. 『국가』를 보면 고대 리디아의 양치기 기게스가 어느 날 지진으로 생긴 동굴 속에서 반지 하나를 발견한다. 투명인간처럼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반지였다. 마법의 힘을 갖게 된 기게스는 악한 마음을 먹는다. 왕비와 간통하고 왕을 암살한 뒤 왕위를 찬탈한다.

플라톤은 이 기게스 반지를 통해 권력이 자칫 올바른 사람도 그릇된 길로 이끌 수 있음을 경계한다. 권력이 탐욕과 만난다면 백 퍼센트다. 칸트가 “권력은 이성의 자유로운 판단을 방해한다”고 말한 것도 다른 뜻이 아니다. 이어 몽테스키외의 말처럼 “권력을 가진 자는 권력의 한계를 발견할 때까지 계속 남용”하다가, 결국 마키아벨리가 말한 대로 “오래된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게” 되는 것이다.

베네딕토 16세의 사임은 그래서 더 신선하다. 더 이상 짊어질 수 없는 짐을 내려놓을 때를 아는 모습인 까닭이다. 자신 앞에 조아리는 시선들이 곧 힘이 아니라 짐인 것을 알기에 가능한 일이다.

기게스의 반지가 원래 기게스 것이 아니었듯, 권력자들도 언젠가 권력을 쥔 손을 펴야 할 때가 온다는 게 교황의 마지막 교훈이다. 애초에 주제넘은 권력을 탐하지도 말아야지만 얻은 권력을 내려놓아야 할 때를 잘 알아야 한다는 거다. 종신직도 아닌 자리를 중도에 그만두라는 거냐면 어리석다. 자리가 주는 부담에 짓눌리지 않도록 그 권력을 남용해서는 안 된단 말이다.

다시 말해 권력은 힘이 아니라 짐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짊어지고,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할 때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때를 놓치고 욕심을 부리면 짐을 떨어뜨려 깨뜨리거나 허리를 다칠 수 있다. 짐이 깨지면 조직과 국가 구성원들의 피해고 허리를 다치면 스스로 피해를 입는다. 왕위를 훔친 기게스도 처음엔 국가를 잘 다스렸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은광을 개발해 국부를 늘렸다. 하지만 그의 짐은 점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고 침략자 손에 목숨을 잃었다.

정권 출범도 하기 전에 내려놓음부터 말하는 게 안됐지만 이전 권력자들이 워낙 짐을 험하게 굴려왔기에 도리가 없다. 매번 권력자가 다치는 모양새도 민망하거니와 더 이상 이리저리 굴러 골병들기 싫은 국민 한 사람의 하소연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