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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률·절세 추구하는 '리치 노마드' 국내 출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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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호 20면

부자 증세 움직임이 본격화한 올해 이런 머니 무브(money move)의 속도는 더 빨라진다고 금융권은 입을 모은다. 수익률과 절세를 찾아 떠도는 ‘리치 노마드(rich nomad·부유한 유목민)’의 출현이다. 리치 노마드는 원래 무거운 세금을 피해 국적을 바꾸는 부유층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 프랑스가 이들 때문에 난리다. 최근 국내 금융권에선 투자처를 찾지 못해 자산을 싸들고 이리저리 떠도는 수퍼리치를 이렇게 부른다.

저금리·세금 피해 움직이는 '머니 무브' 본격화

20억원 가까운 돈을 1년 넘게 증권사 CMA에 넣어두고 있는 송모(63·여)씨가 이런 경우다. 부동산 시장이 꺼지는 걸 보고 보유 부동산을 재빠르게 팔아 처분했지만, 이를 다시 투자할 곳은 찾지 못했다. 연 2% 남짓한 이자만 받으면서도 CMA에 돈을 넣어두는 건 부동산도 주식도 아직 투자 시점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에 차지 않는 CMA 이자도 과세 대상이 된다는 것. 송씨는 “턱없이 낮은 수익인데도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자가 되게 생겼다”고 푸념했다.

리치 노마드 덕에 시중엔 대기 자금이 흘러 넘친다. 지난달 31일 기준 CMA 계좌 잔액은 41조5952억원. 지난해 12월 31일(40조5263억원)보다 1조원 이상 늘었다. 반대로 정기예금 잔액은 급감한다. 지난해 12월 시중은행 정기예금 잔액은 556조4000억원으로 전달보다 10조원 이상 줄었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연 3% 수준의 정기예금 금리는 세후 수익률과 물가까지 감안하면 실질적으로는 마이너스”라며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일시적으로 단기 자금에 돈이 몰린다”고 설명했다.

장기 저축성 보험 비중 확대일로
금융 전문가들은 투자처를 찾지 못해 떠도는 자금이 중장기적으로는 갈피를 잡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고령화와 부자 증세, 부동산 침체라는 환경을 고려하면 돈이 쏠릴 곳은 거의 정해져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큰 줄기 중 하나는 장기 저축성 보험과 연금 상품 비중의 확대다. 공시 이율이 정기예금보다 높고 절세 효과까지 있는 장기 저축성 보험에 시중 자금이 더 몰릴 수 있다. 이달 14일로 무제한 비과세 혜택이 종료되는 즉시연금에 뭉칫돈이 쏠리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1일 즉시연금 판매를 재개한 삼성생명에는 하루 만에 5000억원이 넘는 계약금이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생명은 몰리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4일부터 은행을 통한 즉시연금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이광호 삼성생명 홍보부장은 “최근 채권 금리도 떨어지고 주가도 불안정해 프라이빗뱅커(PB)들이 즉시연금을 많이 권유한다”며 “즉시연금의 비과세가 끝나더라도 절세 혜택이 있는 장기 저축성 보험은 꾸준히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승희 우리투자증권 연구위원도 “금리가 낮을수록 세금을 절약하려는 투자자들이 늘기 때문에 보험으로의 자금 유입은 지속될 것”이라며 “앞으로 절세 효과를 노린 장기 자금과 일정 이상 수익률이 보장되는 단기 자금으로 자산 운용이 양분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종합과세 덕에 주식 시장도 뜰까
돈보따리를 싸들고 떠도는 리치 노마드가 결국엔 주식·펀드 같은 위험 자산으로 눈길을 돌릴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국내 주식 및 주식형 펀드에 투자해 생긴 이익은 비과세라는 매력이 있어서다. 실제로 외환위기로 시행이 중단됐던 금융소득종합과세가 2001년 재개되자 주식형 펀드에는 1조원 이상의 자금이 단박에 유입됐었다. 금융투자업계는 이번 금융소득종합과세의 기준 하향 조정으로 주식 투자가 다시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김용구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2000년대 초반엔 금융소득종합과세로 인한 절세 수요가 높았던 데다 증권사가 점포 수를 급속히 늘려 질적·양적 성장을 뒷받침했다”며 “최근 증권사들이 고액 자산가 관리를 강화하고 절세 이슈가 재부각된다는 게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글로벌 증시가 살아나지만 국내 투자 심리는 별로 회복되지 않았다. 1, 2년을 두고 볼 때 정기예금에서 최소 20조원 정도는 투자형 자산으로 옮겨올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삼성증권은 가계 자산 중 부동산 자산의 비중이 지난해 69.9%에서 2020년 54.9%까지 줄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현금·예금 자산 역시 같은 기간 11.3%에서 9.3%로 감소하고 대신 보험·연금 자산(6.6→9.3%)과 주식·채권·수익증권 자산(7.3→13.3%)이 크게 늘어난다는 것이다.

부동산 시장도 머니 무브에서 예외는 아니다. 가계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겠지만, 수익형 부동산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지난해 정부가 매입 임대주택 사업자 등록 기준을 3~5가구에서 1가구로 크게 완화한 데 이어 부동산 시장 활성화를 위한 추가 세제 혜택도 기대해 볼 만하다는 게 시장 분위기다. 홍석민 우리은행 부동산연구팀장은 “임대 사업자에 대한 세제 혜택이 강화된다면 오피스텔이나 도시형 생활주택 같은 작은 단위의 임대업보다 다세대주택 등 본격적인 임대업이 인기를 끌 것”이라며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인한 수익을 기대하기 힘든 만큼 세금 혜택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자금 이동 본격화 시기엔 ‘글쎄’
자금 이동의 방향성에는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본격적인 이동이 언제 시작될지에 대한 관측은 전문가마다 다르다. 특히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가 불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단기 변화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구본성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위험 자산에 투자할 때는 세금보다 수익률에 대한 기대감이 더 중요한데, 최근 투자자들은 주식 수익률에 확신을 하지 못하는 분위기”라며 “단기적으로는 주식 시장으로 자금 유입이 가속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홍선 연구위원은 “가계가 최근 3, 4년 동안 지속적으로 위험 자산을 줄여 비중이 바닥이라는 점, 실질금리가 마이너스 수준인 저금리를 감안하면 점진적으로 위험 자산 비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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