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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그곳] ‘은교’ 태릉 소나무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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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은교’에서 청년 적요와 은교가 뛰노는 환상장면. 서울 태릉 소나무숲에서 촬영했다.

희고 고운 소녀가 소나무숲을 질주한다. 뒤쫓는 청년은 수사슴처럼 수려하다. 여리디 여린 연둣빛 숲을 지나, 둘은 즐거이 서로를 희롱한다. 관능적이다. 다음 순간, 청년은 노인의 얼굴로 돌아가 있다. 예순아홉 살의 노시인 적요(박해일)다. 거죽은 세월의 고랑이 깊게 파였으되 눈빛만은 청년인 양 고고하고 청청하다. 열일곱 살 꽃다운 은교(김고은)의 무릎을 베고 어느 봄 노시인이 꾼 백일몽이다.

 지난해 4월 개봉해 관객 134만 명을 사로잡은 영화 ‘은교’를 보고 이 장면이 내내 잊히지 않았다. 박범신 작가의 동명 원작 소설에선 못 봤던 장면이다. 은교를 향한 노시인의 격정을 미학적으로 그려서일까. 1분도 채 안 되는 찰나임에도 여운이 길었다.

 허깨비 같은 나이만 지워내면 저다지도 눈부신 사랑인데, 그걸 늙은이의 노망 취급할 까닭은 뭘까. 노시인의 말처럼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늙음도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닌데. 정초, 원하지 않는 나이를 한 살 더 먹고서 영화 ‘은교’를 떠올린 까닭이다.

 지난달 9일 서울 불암산 기슭 태릉으로 향했다. 태릉은 조선 11대 왕 중종의 두 번째 계비이자, 13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능(陵)이다. 조선시대엔 능 주변에 소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태릉 솔숲은 신림(神林)으로 여겨질 만큼 유달리 깊고 넓었다.

 능을 에워싼 소나무숲은 백설에 잠겨 있었다. 지난해 내린 눈이 여태 순결했다. 영화에서 청년 적요가 은교를 쫓던 숲은, 태릉 서쪽 화장실 뒤편에 있었다. 일반인 산책로와 구분된 관람제한구역이어서 관리소에 양해를 구하고 들어섰다. 겨울 숲은 시인을 닮아 적요(寂寥)했다. 차갑게 퇴적된 눈 속에서 수백 년 된 노송(老松)이 저 홀로 푸르렀다.

 완만한 기슭을 올라 능에 이르자 짙은 소나무숲이 발치에 너울졌다. 아들 명종을 대신해 8년이나 권세를 휘두른 문정왕후가 묻힌 곳답게 태릉은 웅장했다. 하지만 어딘지 허전하고 쓸쓸했다. 생전의 문정왕후는 지아비 중종과 합장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첫째 계비 장경왕후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에 누워 있던 중종을 1562년 지금의 서울 삼성동으로 이장하면서까지 단둘이 극락왕생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삼성동은 상습 침수구역이었고, 효심 깊은 명종은 1565년 어머니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양지바른 불암산 자락에 모셨다. 부부의 능이 한강을 사이에 두고 멀어진 사연이다.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 오후 2시 태릉에 가면 해설사로부터 그 기구한 역사를 들을 수 있다. 02-972-0370.

나원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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