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용준 안창호가 된다면…헌법정신 훼손 우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새 정부의 첫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한 김용준 인수위원장은 대법관과 헌법재판소장을 지냈다. 헌법재판소장은 사법기관의 최고 수장이다. 헌법소원 심판은 물론 정당해산 심판, 법률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막중한 자리다. 여의도 정치권조차 스스로 풀지 못한 갈등 과제를 들고 헌재로 향하는 게 현실이다. 지난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 의결로 여론이 요동쳤을 때 탄핵의 효력을 인정할 것인지를 최종 심판한 것도 헌법재판소였다.

 우리 헌법은 헌법재판소를 국회·대법원·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함께 정부와는 독립된 별도의 헌법기관으로 정하고 있다. 국가적 행사 때 헌법재판소장을 국회의장·대법원장·국무총리·중앙선거관리위원장과 함께 5부 요인으로 예우하는 것도 헌재가 지니는 초월적 지위와 권위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능력과 역량을 떠나 사법기관의 수장을 지낸 인사의 국무총리 기용이 3권분립을 존중하는 헌법정신에 맞는가 하는 논란이 김용준 후보자 지명을 계기로 대두되고 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는 내각의 2인자다. 따라서 사법기관의 수장이 행정부의 2인자 자리로 가는 건 모양새나 격(格)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헌법학자도 “독립적인 헌법기관의 권위를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마디로 헌법재판소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상돈 중앙대 법학과 교수는 28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헌재는 대통령 탄핵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데 헌재 소장 출신이 대통령 밑에서 임명직 공무원을 한다는 것은 헌재의 권위와 지위에 상당한 흠을 입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자신의 총리 기용설이 나오자 “박 당선인을 위해서나 조직을 위해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며 고사한 김능환 전 중앙선관위원장의 처신이 더욱 부각되는 이유다. 김 전 위원장은 당시 “선관위원장 경력 때문에 총리직에 부담을 느끼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어찌 보면 그게 굉장히 큰 문제다. 저 개인뿐만 아니라 선관위 입장에서도, 당선인 입장에서도 그럴 수 있다”고 말했었다.

 사법기관의 수장뿐 아니라 대법관·헌법재판관 등이 정부의 요직으로 가는 건 자칫 사법부 독립과 소신 판결 풍토를 저해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헌법재판소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28일 벌어졌다. 안창호 헌법재판관이 검찰총장 후보추천위에 인사검증 동의서를 낸 사실이 드러나면서 파문을 더하고 있다. 한 개인이지만 독립적인 헌법기관인 현직 헌법재판관이 법무부 장관의 지휘·감독을 받는 수사기관의 수장인 검찰총장에 갈 수 있다고 손을 든 것이다.

헌재 내부에선 “헌법기관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망신스러운 처신”이라는 반발이 나온다.

 헌재를 별도로 두고 있지 않는 미국의 경우 연방 대법관이 최고 법관이다. 연방 대법관은 의회의 탄핵을 받거나 본인 스스로 그만두지 않는 한 종신직을 보장받는다. 정치 권력 등 외풍에 휘둘리지 말고 소신껏 판결을 내리라는 게 법의 취지다. 240여 년의 미국 역사에서 대법관이나 대법원장이 행정부로 자리를 옮긴 경우는 한 번도 없다. 다만 미국 27대 대통령인 윌리엄 태프트는 대통령을 마친 뒤 연방대법원장을 지냈는데 당시 “대통령은 왔다가 가지만 연방대법원은 언제까지 이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일본에서도 최고재판소 재판관이 재임 중이나 퇴임 후에 정부 요직으로 이동한 경우는 1947년 최고재판소가 생긴 이래 단 한 건도 없다. 정부직으로 가면 안 된다는 규정이 없는데도 그렇다. 신도쿄(新東京)법률사무소의 기타니 아키라(木谷明·75) 변호사는 “최고재판소 판사의 정년은 70세인데 그 후엔 자신이 세워 온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치나 정부 쪽에는 관여하지 않는 게 상식이자 관례”라고 설명했다.

 정종섭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헌법재판소는 정치 중립의 의무가 있는데 헌법재판관이 다른 자리로 간다고 하면 누구나 다음 자리를 의식하고 재판을 하는 사태가 올 수밖에 없다”며 “헌법재판관이나 대법관은 그 자리가 자신의 마지막 공직이란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하·이동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