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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하원칙만 맞추면 끝, 소설가는 사기꾼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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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판타지 작가 이영도가 중국에 진출한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그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의미를 줄 수 있는 건 타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진 황금가지]

궁금했다. 5년간 신작을 내놓지 않는 그의 속내가. 그럼에도 지난해 말 출간된 그의 e-북이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가. 일본과 대만을 거쳐 중국 대륙으로 진출을 앞둔 그의 행보가 궁금했다. 그래서 그를 만나러 갔다. ‘한국 판타지 소설계의 서태지’라 불리는 이영도(41) 작가의 경남 마산 자택을 25일 찾았다.

 이영도는 한국 판타지 소설 시대를 연 작가다. 1997년 PC통신 하이텔에 연재한 장편소설 『드래곤 라자』는 100만 부 넘게 팔렸다. 무한한 상상력과 깊이 있는 세계관을 드러낸 이 작품은 2004년에는 판타지 소설 최초로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수록됐다.

 팬층도 두터워 그의 책에 한정 상품을 더해 온라인 서점 등에서 선착순 마감하는 이벤트는 수십 초 안에 판매가 끝나고 서버가 다운돼 ‘이영도 대첩’으로 불릴 정도였다.

 ‘문학 한류’에 가장 근접한 작가로도 꼽힌다. 『드래곤 라자』는 일본과 대만에서 각각 40만 부와 30만 부씩 팔렸다. 『드래곤 라자』의 중국 출간 계약도 끝나 이제 ‘중원 공략’을 앞두고 있다. 영문 앱으로 만들어진 단편집 『오버 더 호라이즌』에 대한 해외팬들의 반응도 좋다.

 한국 판타지 문학의 대표작가인 그는 난공불락이었다. 혼잣말을 하는 듯한 특유의 말투에 핵심을 피해가는 답변 방식에 인터뷰 난이도는 ‘최상’이었다.

 그는 우선 ‘작가’라는 말을 불편해 했다. “작(作)했지만 품(品)을 낸지는 몰라서 ‘가(家)’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이유다. PC통신 시절부터 사용한 타자(打者)가 편하다고 했다.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을 두드린 것뿐이란 이야기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인물에 대한 질문에도 즉답을 피했다. 대신 ‘글쟁이론’을 폈다. “글쟁이는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걸 가지고 있는 척 하느라 쓸데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소설가는 육하원칙만 맞추면 되는 괘씸한 사기꾼이고. 사실 등장인물에 대해서도 잘 모르죠.” 그러니 “독자가 읽는 대로 읽는 게 장땡”이라 했다.

 다만 장대한 서사를 구사하는 이야기꾼으로서 그의 눈에 비친 오늘은 서사를 경시하는 시대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요즘의 문화 콘텐트는 서사보다 캐릭터를 앞세웁니다. 드라마의 경우 서사는 5회까지 가야 파악할 수 있지만 캐릭터는 첫 회에 파악할 수 있으니까. 즉물적인 것에 열광하니 캐릭터로 승부하는 거죠. 문제는 캐릭터 조형도 제대로 못하는 데 있어요. 허먼 멜빌의 『백경』처럼 캐릭터만 잘 건드려도 대단한 서사가 나오는데 그걸 못하는 거죠.”

 그는 지난 대선 결과도 비슷한 시각에서 접근했다. “야당이 패한 것도 캐릭터에 집중한 나머지 서사를 만드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거에 대한 언급에 질문은 자연히 지도자에 대한 것으로 흘렀다. 그의 두 작품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가 각각 제왕론과 통치론으로 읽혀서다. 그의 대답은 알듯 모를 듯했다. 일종의 냉소가 느껴졌다.

 “인간은 자기를 통치하고 싶어하는 사람을 통치자로 뽑습니다. 항상 그래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간단한 방법이 통치자에게도 통한다는 것이다. 다만 상호관계인 만큼 이상적인 지도자는 이상적인 피지배자들에게 가장 잘 기능 하겠죠.”

 그는 필생의 역작으로 50권짜리 장편을 쓰고 싶다고 했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전쟁이야기다. 하지만 신작에 대한 질문은 요리조리 피했다. 장편 『그림자 자국』(2008) 이후 새 작품에 목말라하는 팬들의 성화도 압박이 되지 않는 듯했다. 다만 “즐겁고 마음 편히 글을 공개할 공간(하이텔)이 없어서 연재하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좀 아쉽다”고 했다. 작품을 쓴 원동력인 재미가 사라진 이유를 에둘러 말한 것이다.

 그럼에도 글은 꾸준히 쓰고 있다기에 다시 물었다. 신작은 언제 나올까. 대답은 언제나와 같았다. “당신이 전혀 기대하지 않을 때.” 허를 찌르겠다는 그를 만나려면, 아무래도 독자가 빈틈을 보여야 할 듯했다.

마산=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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