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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서 책 놓지 않던 가출 여학생, 명문대 붙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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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입학을 앞두고 있는 ‘위드프랜즈’ 홍보대사 전누리양이 28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 정문 앞에서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웃고 있다. [안성식 기자]

“초등학교 4학년 때인 2004년 여름, 부모의 잦은 다툼이 싫어 집을 나왔어요. 쉼터에서 지내면서도 공부는 계속했죠. 그 3년간 역시 제 삶의 소중한 일부입니다.”

 사춘기 시절, 가출을 경험했던 소녀가 엄마의 손에 이끌려 집에 돌아온 지 7년 만에 당당히 서울의 명문대에 합격했다. 비결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는 거였다. 지난해 고려대 수시 모집에서 학교장 추천 전형으로 정치외교학과에 합격한 전누리(19)양이 그 주인공이다. 대학 측은 학업성적과 리더십 등을 높이 평가해 지난해 12월 7일 전양에게 합격을 통보했다. 28일 고려대 정문에서 만난 전양은 가출 당시 얘기부터 꺼냈다.

 “막상 집을 나왔는데 갈 곳이 없더라고요. 다행히 경기도 시흥의 가출청소년 쉼터 ‘아침청소년의 집’에서 지낼 수 있게 됐어요.”

 쉼터에는 그동안 불량학생으로만 여겼던 친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집에 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부모가 다투는 모습이 선해 꾹 참았다. 전양은 가출 탓에 출석일수가 부족해 초등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했다. 몇몇 동갑내기 쉼터 친구들이 “학년도 어린데 왜 반말을 하느냐”며 그를 왕따시키기도 했단다. 하지만 특유의 밝은 성격을 무기로 그들과 한 식구처럼 어울렸다. “가출 이유가 무척 다양했어요. 가정불화, 왕따, 성적문제 등. 하지만 가출할 만큼 힘든 상황은 그들 스스로가 만든 게 아니라는 건 공통점이었어요.”

 2007년 3월 어머니가 찾아오면서 전양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쉼터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경험과 대화는 간직한 채였다. 쉼터에서도 책을 놓지 않은 덕분에 전양은 중학교에 무난히 진학했다. 고교에서는 학년 대표도 맡았다.

 대학 입학식도 하기 전인데 전양은 벌써 행동에 나섰다. 청소년 지원단체인 ‘위드프랜즈(with friends)’의 홍보대사를 맡아 위기에 빠진 청소년 돕기를 시작했다. 위드프랜즈는 거리에서 방황하는 가출청소년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거나 이들을 상담하고 임시로 보호하는 청소년 지원단체다. 45인승 버스를 개조한 이동 쉼터를 갖추고 서울 영등포역 등에서 수도권 지역 가출청소년 선도활동을 펼치고 있다. <본지 2012년 12월 27일자 18면>
 전양은 “가출청소년들을 보호하는 쉼터들의 상황이 무척 열악하다”고 했다. 실제로 그가 3년 동안 지냈던 ‘아침청소년의 집’은 월세를 내지 못해 지난 19일 건물에서 쫓겨났다. 그나마 지인의 도움으로 시흥시의 한 주택을 임시 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이마저 오는 5월까지 전세금을 마련 못하면 쉼터 청소년 10여 명과 함께 거리로 나가야 한다.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생활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에 전념하거나 유흥업소로 흘러가는 여학생들도 적지 않아요. 그런 상황을 막아주는 곳이 청소년 쉼터인데… 많은 사람들이 함께 대책을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쉼터 운영자인 김형석(58) 목사는 “사회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전양처럼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글=차상은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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