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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영 시조집 '햇빛시간' 펴내

중앙일보

입력

"아가위 열매 익자 가만 휘는 무게여//잎사귀 뒤에 숨은 고 열매 빛깔까지//벌레에 물린 가을이 가랑잎처럼 울었다//보랏빛 여운 두고 과꽃으로 지는 하루//오늘은 한종일 햇살들이 놀러 와서//마른 풀 남은 향기가 별빛처럼 따스했다"('햇살들이 놀러와서' 전문)

중견 시인 유재영(柳在榮.53) 씨가 첫 시조집 『햇빛시간』(태학사.5천원) 을 펴냈다. 1970년부터 시와 시조를 동시에 발표해 오다 30여년 만에 33편의 시조를 골라 엮었으니 시조 자체의 절제의 미학이 팽팽하다.

위 시에서 처럼 가을의 맑고 정갈한 햇살 같이 투명한 언어들이 '마른 풀 남은 향기'같은 인간의 그리움을 여울지게 한다.

"1/마른 잎에/얹히는/그리움의/무게처럼//까마득/지난 생각/눈물보다/맑아서//마음 속/숨겨둔 갈피/등을 거는/먼 사람//2/연잎만 한/세상에서/가을이란/남은 여백//사소한/소리에도/햇빛들은/금이 가고//갈대꽃/야윈 가슴만/하얀 뼈로/우느니"('가을에' 전문)

시조집 제목을 '햇빛시간'이라 했듯 유씨의 시조들은 언어가 투명하다. 그 투명한 언어들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 선명한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정형시에서 운율은 기본이고 그 위에 그림이 그려져야만 한다.

그 그림은 사물들을 오래 바라보고 깊이 있게 생각하는 관조와 달관 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 달관이 있은 후에나 나오는 유씨의 절제된 이미지들이기에 독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것이다.

"개오동/밑둥 적시는/여우비도 지났다//목이 긴/메아리가/자맥질을/하는 곳//마알간/꽃대궁들이/물빛으로/흔들리고,//빨강머리물총새가/느낌표로/물고 가는//피라미/은빛 비린내//문득 번진/둑방길//어머니/마른 손 같은/조팝꽃이/한창이다"('둑방길' 전문)

쓰레기나 풀풀 날리는 가난하고 더러운 둑방길도 유씨의 시조에 들어오면 이렇게 환하다. 메아리도 목이 길게 형상화 되고 피라미는 은빛 비린내로 감각화된다. 이런 맑은 공간에서는 어머니의 마른 손 같은 가난이나 한도 눈시린 쌀밥 같은 조팝꽃으로 풍성하게 들어온다.

끝간데 없는 관조, 절제된 언어는 언어예술의 핵인 시의 처음이자 끝이다. 시인 오탁번씨는 "전통을 고집하면서 억지로 꿰어 맞춘 듯한 요즘의 많은 시조에 비하면 자유로우면서도 시조의 반듯한 그릇에 담겨 있는 시정신은 가히 놀라울 지경"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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