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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의 리더십으로 동아시아 갈등 조정자 역할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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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해 대선에서 한국의 유리천장을 깨뜨렸다. 성적 장벽은 일부 허물었으나 그가 직면한 국내외 도전은 엄청나다. 경제성장 둔화와 동북아의 지정학적 경쟁 격화라는 도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미래가 결정된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체제 출범과 맞물렸다. 동아시아 주요 3개국의 동시 권력 교체는 이 지역의 지정학 구도에 결정적 분수령이 될 수 있다.

 시진핑은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자기네 사람으로 여기고 있고, 아베는 분명한 우익 정치인이다. 중국-일본, 한국-일본의 영토 분쟁이 격화하고, 남북한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맞은 세 나라의 권력 교체는 지역 평화와 안정·번영에 새로운 위험을 야기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 당선인은 대선에서 드러난 소득 분배 악화와 세대 격차라는 국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뿐 아니라 미국·중국·일본과 각각 상호 우호적인 관계를 확대하는 정책을 조심스럽게 펴나가야 한다.

 아시아의 또 다른 경제대국인 인도는 박 당선인이 한국과 인도 간 협력과 교역을 더욱 가속화하기를 기대한다. 전통적으로 강력한 여성 정치 지도자를 많이 배출한 인도는 박 당선인의 등장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서 보수·친미 성향의 지도자가 뽑혔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두 동맹국과의 협력 강화를 바란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는 한·일 간 해묵은 과거사가 동맹 강화에 심각한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여름 예정됐던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GSOMIA)에 서명하지 못하고, 한·일 상호군수지원협정(ACSA)을 맺지 않은 것은 과거사 갈등 때문이다.

 박 당선인이 5년 임기 동안 역사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스타일과 본질(substance)에서 전임자와 달라야 한다. 먼저 스타일에서 건설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으로 ‘불도저’라는 별명이 붙은 이 대통령에 비해 합의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본질에서는 북한과 일본에 대해 더욱 협력적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2008년 취임 이후 대북 강경책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경색시켰고, 지난해에는 일본과의 관계도 별 소득 없이 악화시켰다. 남북 교류·협력이 중단되며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도발에 나섰고, 호전적 발언의 수위를 높였다. 최근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마저 무시하는 처사다.

 박 당선인은 다행히 전임자에 비해 실용주의적이고 균형 잡힌 대외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무조건적인 햇볕정책과 비타협적인 강경책 사이의 중도 노선을 천명했다. 북한의 젊은 새 지도자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고 시사하기도 했다.

 박 당선인의 중도 노선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촉발된 오바마 정부의 강경 대북 정책을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북한과 경제 협력과 교류를 확대하는 것이 한국의 장기적 이해에 부합된다. 그래야 북한 정권이 붕괴됐을 때 한반도 통일 비용이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는다.

 동북아의 핵심 도전은 관련국 관계를 꼬이게 하는 과거사라는 짐을 털어내는 것이다. 이 지역이 경제적으로 성공함에 따라 목소리가 커지는 민족주의는 과거사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교역이 늘었음에도 동북아의 영토 분쟁과 갈등은 잠잠해지거나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갈등을 첨예하게 하고 ‘도 아니면 모’ 식의 치킨게임으로 치닫게 했다. 대립하는 국가들이 정치적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경제적 상호의존은 지역 안정을 가져올 수 없다. 중국은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을 둘러싸고 일본에 대한 공세를 갈수록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이후 빈번하게 주변 해역에 해양감시선을 보내고 영공을 침범함으로써 중국은 수십 년간 이어진 일본의 센카쿠 열도 영유권에 도전했다.

 중국과의 갈등은 일본 내 우익의 목소리를 키웠고, 이는 중국 내 민족주의를 부채질했다. 중국공산당은 일당 독재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민족주의 카드를 활용한다. 두 나라는 헤어나기 힘든 갈등의 악순환에 빠져 있다.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부상은 동아시아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다. 중국 혁명 원로들의 자손인 태자당은 군부와 광범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사실 시진핑이 전임자인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대조되는 점은 인민해방군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군은 갈수록 중국이 강경한 외교정책을 펴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 당선인이 비전을 가진, 역동적인 지도자가 되려면 한국과 동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예지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가 역사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려면 경제를 되살리는 것은 물론 외교적 영향력을 강화해 한국이 중·일, 미·중, 러·일 간 갈등의 조정자(bridge-builder)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브라마 첼라니(51)=자와할랄 네루대에서 국제 군축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도 외무장관 정책자문그룹 위원, 국가안보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인도 정책연구센터 교수 겸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위원, 하버드대·브루킹스연구소·존스홉킨스대·호주국립대의 객원 연구원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아시아의 부상』 『물-아시아의 새로운 전쟁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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