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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 직전, 中서 여성복 팔자 매출이 무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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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우종완 베이직하우스 대표가 서울 삼성동 회사 건물 입구에 걸린 직원들의 사진 앞에 섰다. 이 회사는 직원의 70%가 35세 이하인 ‘젊은 회사’다. [김경빈 기자]

중국 22개 성(省) 어디나 있는 1083개 매장, 중국 비즈니스 캐주얼 남녀 선호도 각 1위, 유럽 1위 브랜드의 중국 판매 위탁기업…. 패션기업 베이직하우스의 우종완(48) 대표가 지금 중국에서 이루고 있는 성과다.

 우 대표와 중국은 뗄 수 없는 관계다. 부산에서 의류 납품 공장을 하던 1990년대 중반, 일본 바이어의 소개로 중국 공장을 견학했다. 하얀 생산모를 쓴 공장 직원들이 흰 점을 뿌려놓은 것처럼 공간에 꽉 들어차 있는 인산인해의 풍경은 우 대표에게 충격이었다. 언제라도 밀릴 수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중국에도 의류 하청 공장을 구했다. 의류 하청 납품에만 매달렸던 우 대표가 자체 브랜드 제작으로 본격 돌아선 것은 2000년 9월부터다.

 부산 공장 1층을 ‘베이직하우스’ 매장으로 꾸미고 ‘티셔츠 5000원’ 식의 전단지를 신문에 넣어 돌렸다. 동네에서 시험적으로 판매를 해보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직원이 실수로 부산 전역에 전단지를 뿌린 겁니다. 야단을 치려는데 손에 전단지를 들고 택시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몰려오는 게 보였어요. ‘아, 이거 되겠구나’ 싶었죠.”

 베이직하우스의 돌풍은 놀라웠다. 설립 5년 만에 코스피에 상장했다. “다른 브랜드 한 벌 값으로 온 가족 옷을 살 수 있는 패밀리 브랜드”라는 컨셉트가 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소비 패턴에 꼭 들어맞은 덕이다. ‘노세일(No- Sale)’ 정책, 남성·여성·아동복·액세서리까지 원스톱 쇼핑, 백화점 입점 대신 대형 직영점 운영 등이 각광받으며 성장해 갔다. “한때는 제가 ‘경영의 신’이 아닌가 착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합리적인 가격의 옷’이라는 가치가 당시 소비자들이 원하던 가치와 맞았을 뿐인데 그걸 몰랐던 거죠.”

 승승장구하던 우 대표는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인한 미국발 금융위기로 큰 고비를 맞았다. 주거래은행이던 외국계 은행이 본사 자금 사정이 급해지면서 베이직하우스에서도 대출금을 회수했다. 그러자 다른 은행들까지 대출금 회수를 요구하면서 순식간에 ‘흑자 부도’ 위기에 몰렸다. 신생 브랜드 두 개를 폐지하면서 직원들이 눈물을 흘리고 퇴사하는 아픔도 겪었다.

 그때 또 한 번 우 대표를 살린 것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중국 매출이다. 중국 매출은 2010년 처음 국내 매출을 앞섰다. 지난해 매출은 3350억원으로 국내 매출(1750억)의 약 두 배다. 기본 디자인, 합리적 가격의 가족 브랜드인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는 장식이 화려한 고가의 여성복으로 성공했다. 광고모델도 중국에서 인기인 한국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 나온 박민영과 유아인으로 바꾸는 등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펼쳤다.

 중국 시장에서 승승장구하자 유럽 1위 속옷 브랜드인 우먼시크릿이 “중국 내 판매를 대신 맡아달라”고 유통 대행을 먼저 제안해왔다. 지난 연말 첫 매장을 열었고 중국 시장에 맞춘 라이선스 제품을 곧 생산할 예정이다. 우 대표는 “중국 시장이 미지수라고 두려워하는 미국·유럽 기업들이 이 시장에서 성공한 한국 기업을 통해 중국 진출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가 새로운 사업 모델을 중국에서 또다시 발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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