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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놓고 쉰다섯에 잡은 붓 … 그 재미에 벌써 아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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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서울 상도동 집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김정녀 선생. 책상 앞에 꼿꼿하게 서서 그림을 그리는 선생의 눈과 팔과 다리에선 팽팽한 긴장감마저 풍긴다. 요즘 주로 그리는 작품은 소나무가 등장하는 산수화다. [신동연 선임기자]

“나이 쉰 넘어 뭐 하겠냐 싶었죠. 그런데 그때 시작한 그림 덕에 노후가 행복하네요.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게 참 재미있어요.”

 늦깎이 동양화가 김정녀(90) 선생은 쉰다섯 되던 해 처음 화실 문을 두드렸던 일을 돌이켰다. “제2의 인생으로 향하는 문이었죠.” 자신의 작품으로 달력을 제작해 지인들에게 나눠준 지 올해로 3년째. 300부 찍은 달력은 벌써 ‘품절’이다.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던 선생이 붓을 손에 잡은 건 1978년부터다. 서울 약수동에서 20년 동안 운영한 병원 문을 닫고 여의도 아파트로 거처를 옮긴 뒤 전업주부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선생의 부모는 일제강점기에 “여성도 전문직을 가져야 한다”며 딸을 공부시켰다고 한다. 선생은 소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인 황해도 연백을 떠나 서울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고려대 의대의 전신)를 졸업해 의사가 된 선생은 병원을 운영하면서 3남1녀를 낳아 키웠고, 공부도 계속해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그렇게 앞으로만 달려온 선생이 돌연 조기 은퇴를 하게 된 건 건강 때문이었다.

 “늘 피곤하고 기운이 없었어요. 신장결핵이란 병명을 알아내는 데도 한참 걸렸죠.”

 나이 쉰다섯, 허리가 아파 6개월을 누워만 지내기도 했다. 집에서 선생이 할 일은 별로 없었다. 대학교수였던 남편(정범석 전 국민대 총장, 2001년 작고)은 늘 바빴고, 아이들은 프랑스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빈둥지 증후군’이 덮칠 조건을 두루 갖췄다.

 “그때 우연히 동네 화실에서 수강생 모집한다는 전단지를 봤어요. 가만히 놀고만 있을 순 없어 등록을 했지요.”

그날부터 꼬박 35년. 선생의 주업은 그림 그리는 일이 됐다. “한 번 그리면 더 나아지고, 두 번 그리면 더 늘고… 그 재미에 세월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몰랐어요. 채색화는 색이 아름다워 좋았고, 묵화는 굵고 가는 먹선이 주는 오묘한 매력이 좋았죠.”

 그동안 선생은 두 권의 화집을 냈고, 2002년엔 서울 인사동 백악예원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요즘에도 매일 집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매주 수요일엔 화실에 나가 동양화가 백초(白楚) 우재경(76) 선생의 지도를 받는다. “80대 땐 하루 대여섯 시간씩 그렸는데, 이젠 서너 시간밖에 못 그린다”지만, 여전히 손색없는 현역 화가의 생활이다.

 “뭘 그릴까, 소재를 찾느라 뭐든 꼼꼼히 봅니다. 바깥 풍경도, 신문 사진도 모두 작품 모티브가 되지요. 마음 속에 그린 형상이 뜻대로 표현 안 될 땐 얼마나 안타까운지….”

 선생은 50대에 몸이 아파 은퇴한 일이 있었나 싶게 정정하다. 그림과 함께 시작한 수영을 10년 전까지 20년 넘게 계속한 덕이다. “요즘엔 소식 이외에 별다른 건강비결이 없다”는데도, 책상 앞에 꼿꼿하게 서서 그림을 그리기에 충분하다. ‘내 일’에 바쁜 삶이니 ‘시어머니 잔소리’할 겨를도 없다. 모두 박사로 키운 4남매(정경위 숭실대 교수, 정연승 한국개도국연구소장, 정연보 코모스검정손해사정㈜ 수산과학연구소장, 정연교 경희대 교수)와 사위(민동필 외교통상부 과학기술협력대사)·며느리(김민영 안지오랩 대표, 양혜란 피아니스트, 장인원 두플라워 대표)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데 그림이 기여한 공도 무시 못한다.

 선생이 작품 속에 호 ‘소전(素田)’을 붓글씨로 써넣은 솜씨도 예사롭지 않았다. 약간 흘려쓴 행서체가 역동적이면서도 정갈했다. 필체에 감탄하자 선생은 “어쩌다 잘 써진 것”이라며 농담으로 받는다. ‘90 노인’의 화법이 19세 청춘처럼 경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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