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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식인 지도] 인간지놈 초안 작성 크레이그 벤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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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모든 생물은 자신이 속한 종(種)의 특성에 맞는 형태를 갖고 있다. 생명체에는 세포 속 깊숙한 곳에 자신의 형태를 만든 설계도가 있다. 이것이 바로 지놈(genome)이다.

생명을 기계에 비유한다면, 지놈은 부품들의 총목록과 부품 사용을 위한 '제품설명서'인 셈이다. 인간 지놈에는 35억년간 생명 진화의 역사에서부터 수많은 질병의 원인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과거.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모든 의문의 답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부품들의 제품설명서 없이 생로병사의 고통을 운명처럼 겪어왔다.

실현 불가능한 꿈으로만 생각되던 인간 지놈 계획이 11년의 대장정 끝에 얼마전 완성됐다. F콜린스 박사의 'HGP 컨소시엄'이 주도한 공공 지놈 계획은 6개국 20개 연구그룹의 과학자 상호간의 성공적인 협조체제 구축을 바탕으로 진행되고 있다.

HGP 컨소시엄은 지놈 정보를 발굴한 지 24시간 이내에 일반에게 무상으로 공개함으로써 지놈의 상업화에 반대하고 있다.

지놈 연구의 또 다른 갈래는 자동화된 기계와 대용량 슈퍼 컴퓨터를 앞세우고 상업적 인센티브를 요구하며 대담한 기술혁신을 시도했던 크레이그 벤터(Craig Venter)에 의해 수행되었다.

미국 셀레라사의 벤터는 노골적 상업주의 경향으로 학계의 거센 비난에도 불구하고 '무작위적 샷건(random shotgun)'법으로 경비를 10분의 1로 축소시키고 계획을 4년 이상 단축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30억달러의 공공자금을 사용하고 1998년까지 전체 지놈 분석의 10%도 못되는 진척을 보인 컨소시엄과,3백대의 전자동 서열 분석기와 대용량 컴퓨터를 이용하며 무모할 정도의 대담성으로 약 9개월 만에 인간 지놈 서열의 96%까지 분석에 성공한 벤터의 행보는 미래 생명공학 혁명이 상업주의와 공공성의 균형 위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새로운 실례를 보여 주고 있다.

지놈 연구는 상업주의의 문제를 제기할 뿐 아니라 생명과학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놓았다. 벤터의 '생명과학 속도론'이 바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의미한다.

이전에 대학 연구실에서 연구자의 호기심을 바탕으로 하나의 유전자 특성을 연구하던 방식에서 세포 내의 모든 유전자들을 동시에 분석하고 유전자들의 네트워크를 알아내려는 양적인 접근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인간 지놈 지도에 있는 3만5천개의 유전자의 발견으로 생명 연구는 기존의 아날로그 시대를 마감하고 재생과 증폭이 자유로운 생명의 디지털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벤터는 21세기 바이오 혁명의 핵심을 파악하고 셀레라라는 민간조직을 통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민첩성을 의미하는 'celerity'에서 유래된 셀레라사는 대부분 반복적이고 기계적 작업인 인간 지놈 분석을 전자동 서열 분석기에 맡기고 쏟아지는 정보는 대용량 컴퓨터로 처리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벤터가 이러한 새로운 학문적 조류에 빨리 적응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의 통찰력과 더불어 EST연구에서 얻은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90년 6월에 인간 지놈 계획이 막 시작됐을 때 벤터는 유전자 고속 발굴법인 'EST'를 창안해 새로운 유전자를 찾고 염색체 내의 위치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92년 8년 동안 근무하던 미 국립보건원 연구소 책임자 자리를 사임하고 비영리 법인인 '타이거(TIGR.The Institute for Genome Research)'를 설립했다.

초기에 HGP 컨소시엄 대표였던 J왓슨 박사에게 육두문자 욕까지 들었던 그는 학계와의 갈등을 뒤로하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지놈 연구에 집중했다.

벤터는 타이거에서 컴퓨터 전문가인 유진 마이어의 도움으로 '전 지놈 무작위 샷건'방식으로 인플루엔자 균의 지놈 분석을 시도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미생물 지놈 분석에 성공했다. 벤터의 첫 생명체 지놈분석의 성공은 많은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98년 5월 벤터는 'PE'(지금은 Applera로 개명)사의 마이크 행커필러가 개발한 모세관 방식의 자동 분석기를 시험한 후 PE사의 토니 화이트 회장과 함께 셀레라를 설립하고 그 해 6월 미국 하원의 청문회에서 앞으로 3년 이내에 독자적으로 인간 지놈 지도를 완성하겠다고 선언한다.

벤터의 전 지놈 무작위 샷건법은 전체 지놈을 여러 번 무작위적으로 잘라서 각 조각을 서열 분석한 후에 서로 겹치는 부위를 연결해 슈퍼 컴퓨터에 자료를 넣어 전체 지놈을 맞추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의 우려에 대해 벤터는 1억8천만개의 지놈을 가진 초파리 지놈 분석에 이 방법을 사용해 박테리아보다 1백배나 큰 지놈을 가진 초파리 지놈 분석에서도 아무 문제가 없음을 보였다.

그러나 학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생물체 지놈에는 반복 염기 서열이 있는데, 초파리의 경우에는 3%에 불과하나 사람의 경우에 35%에 달하는 반복 염기 서열 때문에 전 지놈 무작위 샷건법을 시도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조각의 연결시 오류 발생률이 너무 높아 거의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었다. 벤터는 허풍쟁이.사기꾼 등의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벤터는 일부 HGP 컨소시엄 데이터의 도움을 받기는 하였으나 2000년 6월 17일 인간 지놈 지도 초안을 완성함으로써 2년 전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지난 2월 지놈 계획이 발표된 후 왓슨도 벤터의 방향이 바로 우리가 가야할 것이었다고 인정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6개국의 HGP 컨소시엄에 끼이지 못해 초고속.대용량 정보처리의 경험이 없이 소규모 실험실 연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벤터의 대담한 시도는 단순한 '터프가이'의 돌출행동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21세기 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생존의 문제로 인식돼야 한다.

서정선 서울대 교수.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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