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범, 외로운 어르신 골라 노린다

중앙일보

입력 2013.01.16 00:39

업데이트 2013.01.16 01:21

지면보기

종합 08면

“어르신들, 공연도 보고 선물도 받아가세요.”

 지난해 7월 20일 오전 10시. 충남 천안시 성환읍 중소기업 홍보관. 흥겨운 트로트 메들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100여 명의 노인들이 몰려들었다. 성환시장 인근에 사는 김모(70) 할머니도 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리가 불편해 외출을 거의 안 하지만, 무료 공연을 한다기에 절뚝거리며 나선 길이었다.

 “저희는 ‘조선 팔도 각설이 유랑단’입니다. 공연은 공짜, 선물도 드립니다.”

 이모(44)씨 등 10명은 자신들을 공연팀이라고 소개했다. 각설이 공연이 시작됐다. 몇몇 팀원들은 객석을 돌아다니며 두루마리 화장지를 나눠줬다. 한 팀원이 김 할머니 곁으로 와 안마를 해줬다.

 “아이고, 고마운 청년들이구먼.”

 공연은 며칠간 계속됐다. 오전 10시부터 12시,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하루 두 번씩이었다. 김 할머니는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처음 이틀은 공연을 하고 계란·화장지·설탕 등을 나눠줬다. 사흘째 팀장이라는 사람이 마이크를 잡았다.

 “어르신들, 저희가 건강 식품을 가져왔습니다. 관절염에 특효가 있는 ‘불가사리 골드’. 어르신들을 위해 시중 절반 값인 한 박스 16만원에 모십니다.”

 ‘고마운 양반들이 소개하는 약이니까 좋은 거겠지.’ 김 할머니는 한 박스를 샀다. 다른 노인들도 앞다투어 돈을 꺼냈다. 각설이 분장을 한 팀원이 말했다.

 “이 비누도 써보세요. 태반으로 만든 특제품이 한 장에 2만5000원!”

 김 할머니는 덜컥 비누까지 샀다. 얼마 전 딸이 준 용돈을 탈탈 털어 총 18만5000원을 썼다. 공연이 시작된 지 닷새째. 홍보관에 경찰 8명이 들이닥쳤다. 각설이 공연을 하던 팀원들이 갑자기 달아났다. 경찰은 이모씨 등을 붙잡은 뒤 설명했다.

 “어르신들이 사신 건강식품은 한 박스에 2만원도 안 하는 가짜입니다. 비누도 한 장에 300원짜리를 속여 팔았습니다.”

 각설이 공연단에 속아 물건을 구입한 노인들은 모두 385명. 피해액은 4500만원이나 됐다.

 노인들이 사기·절도 등 각종 범죄의 표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노인 비율이 높은 농촌 지역일수록 범죄 피해가 늘어나는 추세다. 본지 취재진이 이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충남·전남의 시·군 5곳을 취재한 결과, 노인 대상 범죄가 지역 경찰의 주요 사건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충남의 경우 노인 대상(60세 초과 피해자 기준) 범죄가 2007년 2824건에서 지난해 4123건으로 증가했다. 지난해 10월까지 충남에서만 1만8750명의 노인들이 범죄 피해를 당했다. 사기·횡령·절도 등으로 인한 피해액은 101억 5000만원에 달했다.

 전국적으로는 2007년 9만4126건에서 2011년 7만6624건으로 전체 건수는 다소 줄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노인 대상 강력범죄(829건→1110건)와 폭력범죄(1만7155건→2만1428건)는 늘어났다. 경찰 관계자는 “노인 비율이 높은 시골에서는 사기 범죄가 많고 대도시 등에선 노인을 상대로 한 폭력 범죄가 늘어나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미 65세 이상 노인 비율이 20% 이상인 초고령 사회에 들어선 농촌 지역에선 노인을 상대로 한 사기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주로 노인정 등에서 선물을 건네며 환심을 산 뒤 가짜 건강식품 등을 판매하는 사기 범죄가 많다.

 보이스피싱도 대표적인 노인 대상 범죄다. 금융기관을 사칭해 계좌 비밀번호 등을 알아내 돈을 가로채는 방식이다. 지난해 4월 전남 고흥군 금산면에 사는 김모(67) 할아버지는 낯선 전화를 받았다. 한 남자가 “서울청 금융범죄수사관 강XX 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더니 “할아버지 계좌의 명의가 도용돼 수사 중이니 우체국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놀란 마음에 즉시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할아버지는 통장에 있던 412만원을 고스란히 빼앗겼다. 범인은 현재까지 검거되지 않았다.

 혼자 사는 노인이 많은 시골 지역에선 절도 사건이 빈번하다. 문을 열어둔 채 외출하는 일이 잦은 이들의 특성을 노린 범죄다. 지난해 2월엔 2010년 7월부터 1년여 동안 충남 공주·예산·아산·청양 등 농촌 마을을 돌며 37차례에 걸쳐 5500만원 상당의 금품을 훔친 안모(36)씨가 붙잡혔다. 동국대 곽대경(경찰행정학) 교수는 “노인들은 판단력과 인지력이 떨어져 사기범죄에 넘어갈 위험성이 높다”며 “특히 노년의 고독감을 악용해 환심을 산 뒤 가짜 물건을 고가에 강매하는 범죄가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노인이 범죄자가 되기도=노인이 가해자가 되는 사례도 늘어날 전망이다. 실제 65세 이상 노인이 범죄를 저지른 경우는 2007년 5만2815명에서 2011년 6만8836명으로 증가 추세다. 특히 자신보다 약한 어린이 등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12월 13일 경기 화성서부경찰서는 자신의 집에서 같은 동네에 사는 A양(12)을 4개월에 걸쳐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황모(83)씨를 구속했다.

 치안정책연구소 유지웅 책임연구관은 “노인이 직접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늘어나는 것은 우리나라와 일본 등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이라며 “노후에 자신의 인생을 보장받지 못하는 데 대한 분노와 무력감, 외로움 등이 범죄로 표출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