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8세기 말 노비도 서당 세웠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유학자 소눌(小訥) 노상직(1855~1931) 선생이 경남 밀양에 세운 ‘자암(紫巖)서당’. 규모도 크고 운영도 조직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하늘 천(天), 따(땅) 지(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아이들이 한문을 외는 모습은 서당을 말할 때 쉽게 연상되는 풍경이다. 조선시대 가장 기초적인 교육기관이었지만 근대화 물결 속에 지금은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서당의 흔적을 정순우(59·한국학중앙연구원 교육학) 교수가 되짚었다. 고려 말∼조선 초에 등장, 19세기말까지 골격을 유지한 서당의 역사와 의미를 살펴본 『서당의 사회사』(태학사)를 냈다. 1985년 박사학위(‘18세기 서당 연구’)를 받은 이래 30년 가까이 더 이 연구에 집중해온 그는 “나라가 망한 책임을 지고 사라져갔지만 서당은 한국 교육의 발원지였다”고 말했다.

 -서당과 서원이 어떻게 다른가.

 “규모와 기능이 다르다. 서원은 기본적으로 선현에 대한 제사 기능이, 서당은 공부를 하는 강학 기능이 중심이었다.”

 -향교도 있었는데.

 “향교는 정부가 주도하는 관학이다. 군·현 단위로 하나씩 있던 향교의 교육기능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생겨난 게 사설 교육인 서당이다. 일례로 19세기말 전남 구례군 토지면(土旨面)을 보면, 약 115개 가구마다 하나의 서당이 있을 정도로 많았다.”

 -요즘의 강남학원과 비교하면.

 “일반적으로 서당은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서당계를 조직해서 운영했다. 18세기말 서울에 영리 목적의 서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몰락한 양반 계층이나 양반이 아니면서 돈을 번 이들이 교육의 주체로 등장했다. 중인 계층은 물론 노비 출신도 서당을 만들었다.”

 -서당이 오늘에 주는 시사점이라면.

 “촌락이나 마을 공동체가 곧 교육 공동체였고, 그 중심에 서당이 있었다. 편안하고 조화로운 상태에서 교육받는 환경이 조성됐던 것이다. 경쟁과 효율성을 따지며 각박해진 요즘 세태와 차이가 있다.”

 -서당에선 어떤 걸 가르쳤나.

 “오해가 있는데, 기초 한문 교육은 서당에서, 고급 성리학은 서원에서 공부한다는 통념은 잘못된 것이다. 서당의 편차가 크고 다양했다. 서당에서도 성리학 공부를 망라했다. 중인계층의 서당에선 중인 출신 장혼(1759∼1828)이 지은 『아희원람(兒戱原覽)』을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민속·신화의 세계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