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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서소문 포럼

새우, 돌고래, 그리고 박근혜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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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남정호
순회특파원·글로벌협력 담당

오는 17일 서울 한 호텔에선 흔한 듯하되 결코 범상치 않은 모임이 열린다. 국내 기업인과 서울 주재 중국·일본 회사 임원 200여 명이 모이는 첫 3국 기업인 신년 교류회다. 필경 굳은 악수와 덕담이 오가고 푸짐한 음식에 웃음꽃이 필 게다. 지극히 평범한 새해 풍경이다. 하나 특별함은 그 시작에 있다.

 지난해 11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으로 중·일 관계가 최악이던 때였다. 중국에선 격렬한 반일데모와 함께 일본 상점과 회사가 습격을 당한다. 정부 간 채널은 물론 양국 간 상거래마저 꽁꽁 얼어붙었다.

 이 무렵 서울에 위치한 한·중·일 협력사무국에 중국 측 제안이 들어온다. 서울에서 중·일 기업인들 간 교류의 장을 열어 달라는 거다. 꽉 막힌 양국 간 숨통을 한국이 나서 틔워 달라는 부탁이었다.

 옛날엔 턱없는 일이었다. 주변 강국에 치일 뿐 한국이 이들 분쟁에 나설 힘이라곤 없었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이게 한국의 서글픈 자화상이었다. 얼마나 자학해댔는지 ‘한국 새우론’은 수많은 외국 언론과 미 교과서에 실릴 정도였다. 오죽하면 열혈청년단체 ‘반크’가 “한국은 새우가 아니다”며 이미지 개선운동을 벌였을까.

 이런 한탄 속에서도 한국의 국력은 무럭무럭 자랐다. 시선도 조금씩 변했다. 2006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당선은 중대 계기였다. 당시 뉴욕 외교가를 누비던 최영진 유엔대사(현 주미대사)는 이랬다. “전에 새우였다면 이젠 바닷가재는 된 느낌”이라고.

 7년 지난 요즘, 한국은 가재에서 고래 사이를 유영하는 돌고래로 진화된 분위기다. 최근 국제회의에 다녀온 이들의 소감은 한결같다. 하품 해대기 일쑤인 참석자들이 한국만 나오면 귀를 쫑긋한다고.

 그럴밖에. 세계적 불황 속에서 괜찮은 경제 성적에 삼성·현대의 성공, 거기에다 한류, 김연아, 싸이 등 경이로운 성과를 내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한국 아닌가. 이젠 ‘애플·삼성 싸움에 일본 기업 새우등 터진다’는 기사가 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박근혜 당선인의 ‘중견국 외교론’도 이런 자신감 위에 세워졌을 터다. 한국도 당당한 중견국으로 국제사회에 기여하자는 거다. 사실 중견국은 꽤 된 개념이다. 16세기 이탈리아 정치가 지오바니 보테로는 모든 나라들을 제국·중견국·소국으로 나눴다. “타국 도움 없이 자립할 국력을 지닌 나라”가 그의 중견국 정의였다.

 이를 제2차 세계대전 후 재등장시킨 건 캐나다였다. 루이 생로랑 전 총리는 “이해관계 많은 강대국도, 힘없는 약소국도 아닌 중견국만이 국제문제를 풀 수 있다”고 주장, 공감을 끌어낸다. 1956년 수에즈운하 분쟁이 터지자 유엔평화유지군 창설을 제안한 것도 캐나다였다. 그 덕에 레스터 피어슨 당시 외무장관은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그렇다면 중견국 한국은 뭘 해야 하나. 전문가들의 제안은 우선 강대국 간 소통과 타협을 끌어내는 ‘교량국가’ 역이다. 요즘 중·일이 한국에 손 내미는 경우가 잦다 한다. 한·중·일 자유무역협정 체결 건이 단적인 예다. 적극적인 일본은 한국에 망설이는 중국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한다 한다.

 다음은 동남아 등 개발도상국들에 경험과 지식을 나눠주는 거다. 이들은 한국의 성공을 거버넌스와 부패 척결의 승리로 파악한다. 전직 대통령들이 법정에 선 건 한국인들에겐 더없는 수치다. 하나 이들에겐 엄정한 사법제도의 상징으로 비춰진다는 거다. 그래서 한 해 4000명 이상의 후진국 관리들이 한국을 배우자며 날아온다.

 경계할 건 과욕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3년 ‘동북아 균형자(balancer)론’을 들고 나왔다. 미·중 가운데에서 세력의 균형추 노릇을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뜻은 갸륵하나 힘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균형자 외교가 뭔가. 19세기 최강의 영국이 폈던 정책이다. 막강한 해군력을 지렛대로 유럽 열강 중 한쪽이 세지면 반대편과 손잡아 균형을 되찾곤 했다. 게다가 요즘 서구 학계에선 초강대국 미국의 확대를 막으려는 러시아·중국 같은 반미 세력을 균형자로 부른다. 그러니 오해와 웃음을 살밖에.

 다행한 건 부끄러운 경험이 교훈도 준다는 사실이다. 외교정책을 세울 때 정치하게 생각하고 오버하지 말라는 가르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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