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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1월의 행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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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폴란드의 겨울은 잿빛이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해방 기념일인 1월 27일이 되면 독가스실로 끌려간 희생자들의 발걸음을 재현하는 ‘죽음의 행진’으로 아우슈비츠의 거리는 더욱 음울해진다. 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자비로운 신이여, 유대의 어린이들을 학살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마소서. 이 수용소를 만든 자들과 이곳에서 학살을 자행한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마소서.”

 유신 시절에 10대 초반의 소녀였던 어느 대중작가가 대통령 당선인을 겨냥해 “나치 치하의 독일 지식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유신 치하의 지식인들은?”이라는 독설을 쏟아냈다. 수백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에 세계대전까지 일으킨 나치를 유신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뒤틀린 의식의 억지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 나온 김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엘리 위젤이 자전적 소설 『밤(La Nuit)』에 쓴 일화 하나를 인용해야겠다.

 나치 수용소에서 어린 소년이 교수형으로 죽어가는 현장을 목격한 주인공은 ‘도대체 신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분노에 이어 마음속에서 신비한 음성을 듣는다. ‘신은 지금 저 소년과 함께 교수대에 매달려 있다….’ 신의 죽음 같은 절망 속에서 불멸(不滅)의 신성(神性)에 담긴 소망이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수용소의 문이 열리고 자유의 몸이 된 위젤은 분노의 보복 대신에 인간성 회복과 인종 간 화해를 위한 일에 헌신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밤의 기억을 안고 그는 새벽빛의 여생을 살았다.

 수용소에서 온 가족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시몬 비젠탈은 50년 동안 1100여 명의 나치 전범을 추적해 잡아낸 ‘나치 사냥꾼’이다. 수용소에 갇혀 있던 어느 날 비젠탈은 중상으로 죽음에 임박한 나치 친위대원의 병상 앞으로 불려간다. 숨을 헐떡거리던 친위대원은 비젠탈의 손을 붙잡고 눈물로 참회의 고백을 한다.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한참을 망설이던 비젠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떠나고 만다. 비록 죽어가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흉악한 범죄를 쉽사리 용서할 수는 없었다. 참회와 용서 사이에서 방황했던 이 특이한 경험은 비젠탈의 영혼에 깊은 충격으로 남는다. 훗날 살인마 아이히만이 남미에서 체포됐을 때 즉각적인 처형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비젠탈은 이렇게 호소했다.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복수의 처형대가 아니라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스스로 나치 수용소에 걸어 들어가 동족과 함께 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 여성 에티 힐섬은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마저 증오심을 이 세상에 보탠다면 이미 살기 힘든 세상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증오심일지라도….”

 나치의 만행을 온 몸으로 겪은 위젤과 비젠탈과 힐섬의 엄숙한 지성에 비하면 철없는 나이에 유신 시절을 보냈을 독설 작가의 지식이란 것이 어떤 차원의 것일지는 묻지 않아도 알 만하다. 어제의 날들에도 낮과 밤이 있었고 빛과 어두움이 있었건만 굳이 어두웠던 밤의 기억만 더듬는 것은 성실한 지성의 태도가 아니다. 어제의 아픔만을 헤집는 ‘입술의 진보’로 내일의 가치를 지향하는 진보의 지성을 대신할 수 없다.

 찌들도록 가난했던 시절 숙명처럼 단단히 달라붙은 궁핍의 세월을 처연(悽然)하게 살아낸 어른 세대도 4·19 혁명에 거리를 내달리고 유신 독재에 분노를 터뜨리던 저항의 젊음이 있었다. 그러나 누천년을 이어온 절대빈곤을 이 땅에서 몰아낸 열정과 지도력에는 겸허히 머리를 숙일 줄 안다. 이것이 어제의 낮과 밤을 고르게 품어 안은 균형의 역사의식이 아닐까. 1970년대 초반까지 남한보다 경제력이 앞섰던 ‘주체’의 북한은 식량원조로 근근이 연명하는 비(非)주체의 빈곤국으로 전락했다. ‘이밥에 소고기국’은 3대 세습체제의 60년 단골 구호다.

 위젤이라면 1월의 행진에서 ‘자비로운 신’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 것’을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젠탈이나 힐섬이라면 아마도 ‘잊지 않되 용서할 수 있기를’ 기원하지 않을까. 새해 첫 달을 ‘생명의 행진’이 아닌 ‘죽음의 행진’으로 시작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우리의 1월도 희망찬 생명의 행진으로 시작되기를 바란다. 신임 대통령의 임기 5년 내내 연좌제를 떠올리는 유신의 논란으로 지샐 수야 없지 않겠는가. 증오는 평화의 밑거름이 되지 못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법칙을 그대로 실천한다면 세상에는 장님과 이빨 빠진 사람들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경고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