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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행운’ 덕에 양적 완화는 요지부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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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호 22면

미 기준금리와 통화 정책을 결정하는 FOMC 위원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있다. 위원장은 FRB 의장(벤 버냉키)이 겸임한다.

새해 초인 지난 4일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기구인 공개시장정책위원회(FOMC) 회의록이 공개된 뒤 뉴욕 증시의 다우지수가 휘청거렸다. 이틀 동안 100포인트 넘게 급락했다. 이른바 출구전략(Exit strategy) 논란이 재연돼서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위기를 진정시키려고 취한 비정상적 정책인 양적 완화(QE)를 중단할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른바 통화정책의 정상화다. 풀린 돈을 회수한다는 이야기니 시장이 바짝 긴장할 만한 일이다. 그 바람에 작년 말 재정절벽(Fiscal Cliff) 협상의 극적 타결 이후 시장에 번진 유쾌한 분위기가 돌연 싸늘해졌다. 이후 열흘 정도 흘렀지만 양적 완화 중단 우려는 여전하다.

국제경제 연초 달군 美 FOMC 회의록 파문

문제의 회의록은 지난해 12월 11, 12일 열린 FOMC 모임 참석자들 발언을 익명으로 기록한 것이다. 화근이 된 발언은 회의록 9쪽에 들어있다.
‘(FOMC 위원) 두서너 명이 현재 노동시장과 경제 전반을 고려할 때 2013년 말에 자산매입(양적 완화)을 끝내는 게 마땅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중략)…여러 위원들은 금융시장 참여자들의 우려나 (자산매입으로 지나치게 커진 중앙은행의) 대차대조표를 감안해 2013년 말 이전에라도 자산매입을 줄이거나 중단하는 게 적절하다고 말했다.’

2013년 공개시장정책위원회(FOMC) 멤버 성향 범례: 비둘기파(성장일자리 강조로 양적 완화 찬성), 중도, 매파(인플레이션 억제 위해 양적 완화 반대) ※마리 수가 많을수록 성향이 강함

비둘기파 장악한 FRB
얼핏 보면 시장이 긴장할 만하다. 올해 안에 양적 완화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위원이 여럿이라고 한다. FOMC는 다수결 방식이다. 벤 버냉키 의장의 영향력이 크다 해도 그곳에선 한 표 행사일 뿐이다. 1980년대 FRB 의장이던 폴 볼커도 취임 초기 FOMC 위원들의 반대에 시달렸다. 취임 후 1년 넘게 흐른 뒤인 80년 하반기에야 인플레이션 사냥에 나설 수 있었다. 연내 양적 완화를 접자고 주장하는 위원들이 과반수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게 FOMC 구조인 셈이다.

그러나 미 중앙은행 분석가(FRB Watcher)로 유명한 팀 두이(경제학) 오리건대 교수는 개인 블로그를 통해 ‘시장이 성급하게 판단한 듯하다’고 지적했다. 더 나아가 ‘실업률을 6.5% 이하로 낮추지 못하면 내년에도 양적 완화를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올해 FOMC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12명 가운데 양적 완화를 접자고 하는 매파는 단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가운데 비둘기파는 10명으로 압도적이다. 한 명이 중도파로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매파는 경제성장보다 인플레 억제를 중시해 양적 완화에 반대하는 중앙은행가들이다. 반대로 비둘기파는 성장과 일자리를 강조해 양적 완화에 동조한다. 두이 교수가 말한 FOMC 내 유일한 매파는 바로 에스터 조지 캔자스시티준비은행 총재다. 그나마 그는 매파 가운데 온건한 쪽이다. 지난해엔 강경 매파인 제프리 래커 리치먼드준비은행 총재가 FOMC에 참여했다. 래커는 FOMC 룰에 따라 올해엔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

FRB는 “현행 법에 따라 지방준비은행 총재 12명 가운데 5명만이 FOMC 위원이 된다. 뉴욕준비은행 총재는 상근 멤버라 나머지 총재 11명은 해마다 4명씩 교대로 FOMC에서 의결권을 행사한다”고 설명했다.
어떻게 해서 FOMC가 비둘기 광장으로 바뀌었을까.
이른바 ‘오바마 행운’ 탓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누린 행운을 뜻한다. 그는 FRB 이사 7명 전원을 지명하는 행운을 만끽하고 있다. 이사들은 FOMC 상근 멤버다. 이들을 자기 사람으로 채우면 FOMC를 사실상 지배할 수 있다. FRB 이사들이 FOMC 절대 다수를 구성해서다.

오바마가 2009년 1월 취임 후 ‘신(神)의 조화’처럼 FRB 이사들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거나 중도 사임했다. 덕분에 오바마는 첫 4년 임기 동안 이사 5명을 지명했다. 이들은 모조리 성장 중시론자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임 조지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이사는 버냉키와 엘리자베스 듀크다. 듀크는 이미 임기가 끝나 오바마에 의해 후임자가 정해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라고 전했다. 두 사람도 비둘기파여서 오바마의 입맛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버냉키는 내년 1월 말 FRB 의장에서 물러난다. 그의 이사 임기는 2020년까지다. 하지만 전임자들이 의장에서 물러나면서 이사직도 내놓았다. 이런 관행대로라면 오바마는 올 연말께 임기 중 FRB 7번째 이사와 차기 의장을 지명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더욱이 오바마는 집권 8년 동안 FRB 의장을 두 번이나 지명하게 된다’고 전했다. 오바마는 2010년 부시의 사람인 버냉키를 FRB 의장에 재지명했다.

오바마 퇴임 후도 영향력 지속될 듯
오바마의 행운은 20세기 초반 ‘FRB의 아버지’라는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조차 누려보지 못했다. 윌슨은 1913년 FRB를 설립했다. 이전까지 80여 년 동안 미국엔 중앙은행이 없었다. 미 금융 역사가 존 스틸 고든은 최근 기자와의 통화에서 “1910년대 미국은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었지만 변변한 중앙은행 기능이 없어 금융통화 정책은 중구난방이었다”고 평한 바 있다.

여기에다 오랜만에 집권한 민주당 출신 윌슨의 정치적 동기도 FRB 출범에 한몫했다. 그는 중앙은행을 부활시켜 머니 트러스트(금융권력) 월가를 견제하려 했다. 고든은 “애초 공화당이 제출해 놓은 중앙은행 법안은 지금처럼 12개 지방준비은행 체제가 아니라 영국이나 한국처럼 단일 은행 체제였다. 공화당은 본부도 워싱턴이 아니라 금융 중심지 뉴욕에 두고 싶어했다”고 설명했다.

윌슨은 집권하자마자 공화당 법안을 확 뜯어고쳤다. 지방준비은행 12개를 설치하고 사령탑인 이사회는 뉴욕이 아닌 워싱턴에 두는 쪽으로 수정한 것이다. 이사들은 대통령이 전원 지명하도록 명문화하기도 했다. 월가 입김이 FRB에 미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는 법, 윌슨의 뜻대로 FRB가 설립됐지만 월가에 가까운 공화당 의원들의 견제 때문에 윌슨은 이사 7명을 다 채우지 못했다. 공화당 의원들이 윌슨 지명 이사의 인준을 거부해서다.

오바마도 윌슨과 같은 수모를 당하기는 했다. 오바마가 2010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피터 다이아몬드 MIT 교수를 이사에 지명했을 때 일이다. 당시 공화당은 오바마가 FRB를 완전히 장악할까 우려해 시간 끌기 작전으로 인준을 무산시켰다. 회기가 끝나면 인준이 무산되는 법규를 이용한 것이다. 오바마가 그를 다시 지명했지만 다이아몬드 교수가 스스로 후보직을 사퇴했다.
당시 블룸버그통신은 ‘오바마가 다이아몬드 대신 지명한 인물이 바로 제롬 파월이다. 그가 부시 행정부 때 재무부 차관을 지냈지만 비둘기파여서 오바마 경제정책에 딴죽을 걸진 않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실제 파월은 지난해 양적 완화를 지지했다.

FRB 이사 임기는 14년이다. 대통령 임기의 3.5배다. 이사들은 임기 도중 대통령이 바뀌어도 물러날 필요가 없다. 그만큼 정치적 영향을 덜 받는다. 바로 이런 임기보장제도 덕분에 오바마 지명 이사들이 오바마 퇴임 후에도 FRB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로이터통신은 ‘2017년에 취임할 미 대통령도 오바마 사람들이 결정한 금융통화정책을 존중해야 할 상황’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행운은 오바마가 차기 재무장관에 금융통이 아닌 예산복지 전문가 제이컵 루(55)를 지명하는 데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미 투자전문지 알파매거진은 월가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오바마가 FRB를 사실상 장악해 굳이 재무장관에 월가 쪽 인물을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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