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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책방서 ‘심 봤다’ 싶을 땐 체온이 39도로 뛰는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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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호 12면

서울 회현지하쇼핑센터 다열19호의 ‘클림트’는 LP 전문점이다. 주인장 김세환씨는 1년 전 이곳을 인문서적과 음악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오래전에 나온 LP레코드를 찾기 위해 발품을 팔다 보면 김세환(52)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알게 된다. 그는 세상에 나온 레코드를 거의 꿰고 있다. 이름난 음반 컬렉터들의 레코드 라이브러리도 알고 보면 그가 채워준 경우가 허다하다. 자타가 인정하는 음반 세계의 최고수다. 그런 그가 1년 전 레코드 가게에 책을 잔뜩 쌓아 놓더니 이제는 제법 알려진 인문학 전문서점으로 키워놓았다. 김세환씨를 음반 전문가로만 알던 사람들은 그의 집 서가를 가득 채운 장서를 보고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김씨는 뜻한 바 있어 평생 모으고 읽은 책으로 책방을 꾸미고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20년 역사의 음반점 "클림트"는 레코드와 책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변신했고 가게는 안정궤도에 진입했다.

LP레코드점에 인문학 서적 코너 꾸민 김세환씨

김씨가 꿈을 펼치는 공간은 서울 충무로 신세계백화점 본점과 서울중앙우체국 사이에 있는 회현지하쇼핑센터다. 이곳은 명동 상권에 속하지만 통로를 천천히 걷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간 느낌이 든다.
진열장의 유성기, 클래식 카메라, 손뜨개질 스웨터는 옛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곳에선 상가 중심에 모여 있는 LP가게들이 가장 큰 볼거리다. 무슨 배짱인지 클림트엔 간판도 없다. 그럼에도 가게 바깥에까지 쌓여 있는 책과 레코드 더미는 숨은 보물을 찾는 손님들을 끌어 모은다. 한파가 계속된 8일 클림트에 들어서자 책과 레코드 사이로 바흐의 칸타타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가 조용히 울렸다. 김세환씨는 이날 오전에 챙겨온 전리품의 먼지를 털고 있었다.

-전리품으로 무슨 책을 가져왔는가.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러시아 소프라노,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아내)의 자서전이 나왔더라. 쇼스타코비치의 증언과 같이 읽으면 스탈린·흐루쇼프 시절을 관통하는 음악·예술·정치를 알 수 있다. 니체의 반(反)시대적 고찰과 김흥호의 주역강해, 유길준의 서유견문, 그리고 생태소설의 원조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 워터멜론 슈가에서를 구했다.”
-이런 책들을 어디서 찾았는가.
“청계8가 동묘 근처의 책방들이다. 청계천 서점 책 읽는 마을 영광서점은 매일 순례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이 동네가 후지다고 생각하겠지만 나한테는 보물이 널린 곳이다. 가끔은 맘속으로 ‘심 봤다’를 외칠 때도 있다. 그런 때는 체온이 섭씨 39도쯤으로 오르는 것 같다.”
-관심 분야는.
“크게 보면 인문학이다. 문·사·철(文·史·哲)에 종교와 예술이 포함된다. 종교는 특히 불교 쪽이다. 책을 읽다 보니 철학과 불교의 관계가 긴밀하더라.”
-레코드 고수가 왜 서점까지 하게 됐는가.
“나는 오타쿠(한 분야에 광적으로 몰두하는 사람) 기질이 있다. 전에 샀던 책도 개정판이 나오면 또다시 산다. 반대로 개정판을 사면 첫 판본을 찾는다. 그것은 음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책이든 음반이든 즉흥적으로 산 적은 없다. 버킷리스트를 적어놓고 산다. 원하는 걸 구하면 리스트에서 지우고 그러면 또 갖고 싶은 책이 생긴다. 그게 즐겁더라. 그러다 보니 집에 4만 권의 책이 쌓였다. 너무 많아 감당이 안 돼 고민하다 ‘클림트’에 내놓자고 생각했다. 좋은 책을 찾는 사람들에게 내 책을 나눠 주고, 새로운 책을 끊임없이 보충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민생고도 자연스럽게 해결하고 말이다. 서점을 하게 된 더 중요한 이유는 한국엔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제대로 갖춰놓은 곳이 없어서다. 헌책방을 가보면 잡서가 너무 많다. 외국에는 분야별 전문 책방이 많다. 유럽 여행길에서 만난 헌책방 주인장들은 다들 머리가 희끗한 노인들이더라. 그들은 음반과 책에 대한 지식이 깊고 넓다. 그게 부러웠다. 나도 ‘클림트’를 그렇게 만들고 싶다.”
-개인 장서가 4만권이라니 놀랍다. 평생 독서를 했겠다.
“중학 시절부터 책을 읽었다. 영화의 경우 처음엔 배우를 보고 다음엔 감독을, 나중엔 이 미장센(여러 요소가 어우러진 영화의 한 장면)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작가를, 다음엔 번역자를 보고 나중엔 역사적 맥락에서 이 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각했다. 수십 년 그렇게 하다 보니 책이 쌓이고 좋은 책을 보는 안목도 생겼다. 제도권 교육에 관심없어 대학 진학은 안 했다.”
-가게 이름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에서 가져왔는가.
“그렇다. 서양사에서 1880년부터 1913년 제1차 대전 이전까지를 ‘벨 에포크’라 한다.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호프만슈탈, 프로이트 등의 천재들이 어울리던 빈(Wien)에 깊은 동경을 품고 있다.”

-클림트에는 어떤 사람들이 오나.
“공부를 하는 학생, 강의하는 분, 책 초본을 찾으려는 오타쿠들…. 모두 책을 깊이 좋아하는 분들이다. 이런 분들이 클림트에 와서 원하는 책을 찾고 기뻐하는 걸 보며 보람을 느낀다.”
-단골 고객이 얼마나 되나.
“휴대전화에 저장돼 있는 사람만 100여 명이다. 모두 클림트를 사랑하는 분들이다.”
-갖고 있는 책 중 자랑할 만한 게 있다면.
“이반 일리히, 장 아메리, 서경식. 모두 디아스포라(diaspora·離散)의 지식인들이다. 이 사람들의 저작이 다양하게 갖춰져 있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플레야드 총서, 일본 이와나미 문고, 옥스퍼드·케임브리지 등 명문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원서 등이 있다. 우리나라 대학교 출판부는 토대가 허약하기 그지없다. 서울대학교 정도면 인문학 인프라가 이미 확립돼 있어야 하는데 이제 시작하고 있는 단계인 것 같다. 말이 안 된다.”
-최근 뉴스위크가 종이잡지 인쇄를 포기했다. 중앙SUNDAY도 태블릿 PC용 모바일 버전을 냈다. 전자책도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세상이 디지털로 바뀌는데 종이책방을 시작했다. 시대에 역행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역행이란 표현이 상당히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대세는 디지털이다. 외국에선 거의 e-북을 본다. 미국 공공도서관에서도 종이책을 줄이는 추세다. 여기에 가속도가 붙으면 붙지 줄어들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황금기에 만들어진 수많은 LP판이 CD화되지 않는 것처럼 모든 책을 e-북으로 만들기는 힘들다. 종이책은 분명 주류는 아니지만 빛나게 살아남을 것이다.”

-당신에게 헌책이란 어떤 것인가.
‘오래된 사물과의 마주섬’이다. 옛날 책을 사면 밑줄이 그어져 있지 않은가. 네잎 클로버나 낙엽이 끼워져 있기도 하다. 옛 사람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손으로 한 페이지씩 책장을 넘기다 보면 심정적으로 무한한 안정감을 느낀다. 바로 그런 게 요즘 유행하는 힐링이다.
-신문도 중앙SUNDAY를 비롯해 여섯 가지를 본다고 들었다. 보수·진보성향의 신문을 고루 보는 게 특이하다.
“보수·진보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나는 중용을 추구한다. 중용은 ‘가운데’가 아니라 ‘바른 것’이다. 신문마다 성격이 다른데 나는 유익한 부분만 취한다. 중앙SUNDAY는 스크랩할 기사가 많다.”
-대통령 선거에서 지지후보가 당선됐나.
“안 됐다. 가슴이 아프다.”
-‘멘붕’ 상태까지 갔는가.
“힘들었지만 극복했다. 51.6%는 패자를 위로하고 48%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일부 유권자가 백악관에다 개표를 다시 하게 해 달라고 청원하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 중 상당수는 반미주의자들 아닌가. 인정을 안 하니까 멘붕이 오는 거다. ‘다 이긴 게임에서 왜 진 거야’라고만 생각해서는 권토중래할 수 없다. 왜 민심을 얻지 못했나에 대한 비판적인 사유가 있어야 가능성이 생긴다. 나는 새 정부를 냉소적 입장이 아닌, 비판적인 시각으로 지켜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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