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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병·순사 충돌…군부·내무성 맞서자 일왕 개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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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호 26면

서안사변 당시 장개석이 연금돼 있던 서안 화청지 오간청.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서려 있던 이곳이 중국 근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장소가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존황토간(尊皇討奸)’을 기치로 총리대신 오카다(岡田啓介)와 내대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등을 살해한 1936년의 2·26사건 이후 군부는 국가 차원의 조직폭력배로 변해 갔다. 경찰이 군인과 다투었던 1933년의 ‘고스톱 사건’은 이미 신화였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폐허와 희망 ② 최종전쟁론이란 국책

1933년 6월 17일 오사카(大阪) 덴신바시(天神橋) 부근에서 제4사단 소속 나카무라(中村政一) 일등병이 영화를 보러 가다가 교통계의 도다(戸田忠夫) 순사에게 신호등 위반으로 적발됐다. 나카무라는 “군인은 헌병에는 따르지만 경찰관의 명령에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저항하면서 난투극이 발생해 양자가 모두 부상을 입었다. 6월 22일 선민(選民)의식으로 무장한 4사단 참모장 이세키(井關隆昌) 대좌는 “이 사건은 일개 병사와 일개 순사의 사건이 아니라 황군(皇軍)의 위신이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라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경찰의 사과를 요구했다.
아와야 센키치(粟屋仙吉) 오사카 경찰부장도 “군대가 폐하의 군대라면 경찰관도 폐하의 경찰관이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맞서면서 군부와 내무성의 대립으로 확산되었다. 아와야 경찰부장은 1945년 8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 시장으로 있다가 사망하는데 세칭 일고(一高)라고 불렸던 제일고등학교와 도쿄제대 법학과를 나온 엘리트 관료였다.

오간청 내부. 장개석과 송미령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는 것이 이채롭다.

5相회의에 육군·해군대신 들어가 좌지우지
‘관청 중의 관청’이라고 불렸던 내무성 중에서도 아와야가 속했던 경보국(警保局:지금의 경찰청)에는 도쿄제대 법학부를 상위의 성적으로 졸업한 엘리트들이 포진하면서 ‘신관료(新官僚)’로 불렸다. 신문은 연일 ‘군부와 경찰의 정면충돌’이라고 보도했고, 오사카의 요세(寄席)라고 불렸던 만담장의 소재로 사용되었다.

8월 24일에는 목격자였던 헌병 다카다(高田善)가 자살해 흥미를 더했다. 드디어 양측의 충돌을 우려한 일왕 히로히토(昭和)는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內壽一) 4사단장의 친구였던 시라네 다케스케(白根竹介) 효고(兵庫)현 지사에게 특명을 내려 중재하게 했다. 일왕이 걱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군부는 급속하게 태도를 바꾸어 사건 발생 5개월 만인 11월 18일 이세키 참모장과 아와야 경찰부장이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고, 20일에는 사건 당사자인 도다 순사와 나카무라 일병이 와다 료헤이(和田良平) 검사관사에서 악수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10월 23일 후쿠이(福井)현에서 육군특별대연습을 참관하던 히로히토가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육군대신에게 ‘오사카 사건은 어떻게 되어가는가?’라고 묻자 황군(皇軍)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아라키가 ‘황군은 폐하께 걱정을 끼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면서 데라우치에게 사건을 끝내라고 지시했다는 설도 있다. ‘진지사건(進止事件)’이라고도 불리는 고스톱사건은 민간 엘리트들이 군에 제동을 건 마지막 사건이 되었다.

메이지헌법의 통수권(統帥權) 개념 때문에 일본군에는 황군(皇軍)이란 개념과 민간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위험한 개념이 생겨났다. 군부는 자신들을 황국(皇國)의 이상을 실현하는 존재로 격상시키면서 군대 밖의 사회를 ‘지방’ 또는 ‘사바’라는 한 단계 낮은 분야로 취급했다. 이런 군부에 의해 해군대장 출신의 현직 총리까지 살해되면서 군부에 대한 민간의 공포는 급속도로 커져 갔다. 이미 거대한 폭력조직으로 변질된 군부의 횡포에 대해 일본 국민은 2·26사건 때 총리 관저를 사수하다가 사살당한 경찰관 유족에게 성금을 22만 엔이나 내는 것으로 반응했다.

언론들도 5월 1일 민정당의 사이토 다카오(齊藤隆夫)가 의회에서 “국민은 모두 분개하고 있지만 이를 입 밖으로 말할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말한 것을 게재하는 것으로 군부 비판을 대신했다.
사건 이후 데라우치 히사이치 육군대신은 군부의 정치 간여 문제에 대해 “일반 군인의 정치 간여는 금지하지만 군부대신은 국무대신으로서 직무상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했다. 데라우치가 이렇게 말했던 것은 1936년 5월 육해군성 관제의 부속별표(附屬別表)가 개정되면서 육·해군대신 현역제가 부활했기 때문이었다. 1913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고 불렸던 헌정옹호운동의 결과 폐지되었던 현역군인의 육·해군대신 부임제가 2·26사건 와중에 슬그머니 부활한 것이다. 이후 군부의 동의 없이는, 즉 육군이나 해군에서 대신 파견을 거부하면 내각도 구성할 수 없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데라우치 육상(陸相)은 신임 히로다 고키(廣田弘毅) 총리에게 ‘국책(國策) 수립’을 요구했다. 히로다 내각은 군부의 위세에 눌려 ‘총리·외무·대장(大藏)·육군·해군’의 다섯 대신이 참석하는 오상회의(五相會議)에서 주요 국책을 결정했는데, 이 오상회의에서 1936년 8월 7일 ‘국책(國策)의 기준’을 작성했다. ‘국책의 기준’은 외부에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후 일본을 미친 전쟁으로 몰고 간 기본 국책을 결정한 것이었다.

‘국책의 기준’은 “제국(帝國) 내외의 정세에 비추어… 근본 국책은 외교와 국방 모두 동아(東亞) 대륙에 있어서 제국의 지위를 확보함과 동시에 남방해양으로 진출해 발전하는 데 있다”고 결정했다. 북방의 중국과 러시아뿐 아니라 남방, 즉 미국·영국도 전쟁 대상으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국책의 기준’ 원 입안자는 만주사변의 주모자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였다. 그는 1935년 8월 참모본부 작전과장으로 부임해서는 ‘전쟁계획’을 주창하면서 ‘전쟁 지도계획’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육군의 이른바 ‘국방국책(國防國策)’인데 그 골자는 군부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군수공업을 일으켜 세계 최종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주국을 중화학공업기지로 만들겠다는 방침은 이래서 나온 것이었다. 1936년 6월 참모본부는 ‘국방국책’을 입안하고 수행하기 위한 전쟁지도과(戰爭指導課)를 만들어 이시하라가 과장으로 취임했다.

1937년 국방비 대거 증액하자 물가 급등
국방국책은 ‘일만북지(日滿北支:일본, 만주, 화북)’의 지구전 블록을 형성해 소련을 타도하고, 새 중국(新支那)을 건설하고 비약적으로 실력을 향상시켜 미국과의 최종 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전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허황된 세계정복론과 비슷한 이런 공상이 20세기에 실천에 옮겨졌다는 것 자체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육군에서는 12년 계획으로 군비 대확장 계획을 수립했는데 사단 수 증강은 물론 비행기전차화포 등의 근대적 무기의 대폭 확충에 나섰다. 해군도 무사시(武藏), 야마토(大和) 같은 세계 최대의 전함과 항공모함 건조에 나섰다.

1937년 육·해군성에서는 14억 엔이 넘는 국방비를 요구했고 군부의 위세에 눌린 대장대신 바바 에이치(馬場鍈一)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전년도에 비해 일시에 8억 엔이 증가한 30억 엔 이상의 대규모 예산안을 편성했다. 이른바 이 바바(馬場)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4억2000만 엔의 증세를 하고, 8억3000만 엔의 공채를 발행했는데, 예산안이 발표되자마자 물가가 급등해 시장이 혼란스러웠다.

국방국책에 따르면 일본군은 화북(華北) 전역으로 전선을 넓혀야 했으며, 만주국 같은 괴뢰정부를 세워 전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해야 했다.
일본 정부와 군부의 대중국 정책은 ‘무시하고 비웃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가 팽배하면서 일본군은 물론 낭인·민간인들과 중국인들의 충돌이 잦아졌고, 항일 여론이 급격하게 높아져 갔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했다. 일제가 만주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장개석(蔣介石)이 내부의 공산당을 먼저 격멸한 후 일제와 전면전을 전개하겠다는 ‘선내양외(先內攘外) 방침’에 따라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張學良)에게 ‘부저항(不抵抗) 철군’을 종용했기 때문이었다.

만주에서 쫓겨난 장학량은 홍군(紅軍) 토벌에 염증을 느끼고 이 무렵 공산당과 비밀협상을 진행했다. 비밀협약 1단계가 홍군과 동북군 사이의 적대행위를 중지하는 것이었다. 장개석은 서안까지 날아가 장학량에게 공산당 토벌에 적극 나서라고 요구했지만 장학량은 1936년 12월 12일 ‘내전 중지, 일치 항일’을 주장하면서 장개석을 서안 화청지(華淸池)에 감금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켰다. 공산당 내에서는 장개석 처형 목소리가 높았지만 모택동(毛澤東)은 주은래(周恩來)를 서안으로 파견해 항일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조건으로 오히려 장개석의 석방을 종용했다.

일본 정부와 군부는 서안사변의 기본적 성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당초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더욱 반공정책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반겼다. 그러나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들인 장개석은 12월 25일 장학량과 함께 낙양(洛陽)으로 귀환하면서 중국인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1937년 1월에는 모택동이 서안에 입성했다. 1937년 2월 국민당 3중전회는 내전 정지와 화북(華北)의 실지(失地) 회복을 결의했다. 이렇게 제2차 국공합작, 즉 항일민족연합전선 결성이 눈앞에 드러나면서 전 중국이 항일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여전히 중국을 얕보고 전쟁 확대에 나섰다. 이런 점에서 중일전쟁 발발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