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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엄동설한에 이브닝 드레스? 한복은 어때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05호 21면

몇 년 전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 적이 있다. 각자의 지인을 불러 서로 소개시켜 주자는 이벤트였다. 카페도 빌리고 음식도 준비하고 그러면서 뭔가 깨알 같은 재미가 필요했다. ‘드레스 코드(복장 규정)’를 생각해 냈다. ‘레드’였다. 혹여 차림새 때문에 겁먹고 못 올 인사들이 있을까 싶었지만 웬걸. 그날 손님들은 다행히, 그리고 수줍게나마 모두 빨간 무언가를 걸치고 나타났다. 주최 측 입장에서 보자면 베스트 드레서도, 워스트 드레서도 없었다. 그저 ‘잘 놀아보자’며 용기를 내준 그 성의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스타일#: 공연장 드레스 코드

그때 생각이 든 건 지난 주말 열렸던 한 음악회 때문이었다. 77세 거장 지휘자인 주빈 메타가 이끄는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콘서트. 메타의 지휘를 언제 또 국내에서 볼 수 있으랴 하는 이유로 주목을 끈 공연이었다. 게다가 더욱 화제가 됐던 것은 ‘드레스 코드’였다. 주최 측인 공연기획사는 티켓 예매자들에게 일찌감치 권장 옷차림을 안내했다. 남자는 턱시도 또는 어두운 계열의 양복, 여자는 이브닝 드레스나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오라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그것도 일반인을 상대로 한 클래식 공연에선 매운 드문 경우였다. 이를 두고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삐딱한 시선까지 나오자 기획사 측이 밝힌 의도는 이랬다. “신년콘서트인 만큼 한껏 멋을 부려보자는 취지에서 드레스코드를 제안했다. 음악만이 아니라 문화를 즐기자는 컨셉트다.”

어쨌거나 궁금했다. 보통 한국인 중에 턱시도나 이브닝 드레스를 결혼식 때 말고 입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될지, 이 한파에(그것도 산바람 거센 예술의전당에서) 사람들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드레스 코드를 해독해 낼지 말이다.

6일 공연장 바깥 기온은 영하 7도. 나 역시 정장 치마에 코트를 입어 ‘원피스를 입은 양’ 대신했고, 치마임을 드러내느라 부츠가 아닌 하이힐도 신었다. 뺨이 얼얼할 정도로 찬바람이 불었고, 길거리는 빙판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공연장 로비로 들어섰다. 한쪽에선 어깨를 훤히 드러낸 오프숄더 드레스에 모피 숄을 두른 중년 부인이 서 있는데, 그 옆에는 패딩점퍼에 청바지, 운동화를 신고 온 청년이 보였다. 이미 추위를 실감하고 있었던지라 무턱대고 ‘의지의 문제’라 말하기도 모호했다. 솔직히 살이 훤히 보이는 투명 스타킹에 레이스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를 보자니 애처롭고, 그렇다고 실크 드레스에 온몸을 모피로 감싼 부인을 보자니 위화감이 들었다.

드레스 코드란 본래 참석자들이 은밀하게 공유하는 비밀 암호 같은 것이다. ‘의무 사항’이 아니라 행사에 소속감을 느끼면서 스스로 즐거움을 극대화시키라는 ‘특권’이다. 무엇보다 행사를 마련한 이에 대한 예의의 표시다. 그래서인지 나름의 방식으로 코드를 맞추려 애쓴 ‘노력형’ 관람객들의 차림에 점수를 주고 싶었다. 정장에 캐주얼화를 신은 할아버지, 핑크색 원피스에 롱패딩 점퍼를 입은 아가씨, 깔끔한 일자 코트에 레깅스 바지를 받쳐 입은 중년 부인들이 그랬다. 아마도 마음은 이게 아니었는데 ‘뚜벅이’로 오기엔 너무 추워 저렇게 입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 말이다. 그 가운데 “정초이고 신년음악회니까 한복을 입었다”는 주부, 보통 정장이지만 보타이를 맨 신사에게선 드레스 코드를 멋지게 해독해 낸 센스까지 엿보였다.

이날 관람객 중엔 드레스 코드를 두고 웬 오버냐며 반감을 가진 이들도 있을 터다. 해외 공연장에서도 요즘은 대개 특별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음악회 가려면 정장 입어야 하나요?(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라는 책의 한 구절이 유용할 듯 싶다.

“(공연장에 갈 땐) 비즈니스 미팅이나 친지 결혼식에 간다고 생각하고 옷을 고르자. 아니면 예배에 참석하거나 은행에 대출받으러 갈 때, 법정에 출두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때 가는 복장이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드레스 코드의 본질은 예의 아니, 성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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