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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가 ‘미디엄 웰던’으로 익어도 그 험난한 주방을 못 뜨는 까닭은 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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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호 26면

저자: 마이클 룰먼 출판사: 푸른숲 가격: 1만7000원

지금은 미식의 시대. 각종 음식 이야기가 신문과 잡지를 장식하고, 요리 전문 채널이 하루 종일 요리 쇼를 내보낸다. 스타 셰프도 줄줄이 등장한다. 화려한 경력, 창의적인 레시피와 달변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으며 요리를 예술이라 외치는 그들. 1년 내내 감자만 깎았다는 인고의 세월이 호텔 주방장의 훈훈한 성공미담으로 전해지던 것도 옛말, 외국 유학을 마치고 온 스타 셰프들의 화려한 외양에 어느덧 요리의 세계는 많은 이가 꿈꾸는 판타지 세상이 됐다.

『셰프의 탄생』

이것은 고스란히 1990년대 미국 상황이기도 하다. 푸드 네트워크 채널이 개국하고, 스타 셰프들이 세계적 거물로 성장하자 셰프 지망생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셰프의 세계는 정말 화려할까? 그 비밀을 찾아 뉴욕타임스 출신 저널리스트가 최고의 요리학교라는 CIA에 몸소 입학했다. 실제 학생 신분이 되어 셰프가 되기까지 생생한 여정을 기록한 이 책은 97년 출간돼 요리 현장의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호기심은 할아버지가 수십 년 전 한 레스토랑에서 맛본 감자 요리에 대한 추억에서 비롯됐다. 하찮은 감자 요리를 ‘마치 예술가와 같은 손길을 요리 한 접시에 담아 냈다’며 수십 년간 잊지 못한다면, 요리도 분명 예술일터. 그렇다면 요리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셰프의 조건은 뭘까?

프랑스 르 코르동 블뢰, 일본 쓰지조리학교와 함께 세계 3대 요리학교로 꼽히는 미국 CIA는 매년 2000명 넘는 학생이 등록하고 연간 예산이 6500만 달러에 달한다. 새로운 수업을 추가하거나 새 책을 내면 3000억 달러 규모의 전미 요식업계가 일제히 출렁이는 요리 교육계의 하버드다.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기본’. 정통 프랑스 요리의 기본이 되는 스톡과 브라운 소스 제조다. 흥미로운 것은 기본을 강조하면서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 베토벤 소나타에 비유할 만하다. 어떤 음계가 들어 있다는 표준은 있지만 특정 음을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곡의 해석이 얼마든지 달라지듯 표준과 강사만의 노하우를 모두 전수하고 선택의 여지를 남긴다.
기본 스킬 이후의 조리 실습 과정은 더욱 그렇다. 가르쳐주기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칼질 방법 따위는 필요에 따라 본인이 선택하면 그만. 모든 것을 가르쳐주지 않고 스스로 해결할 숙제를 남기는 것은 직접 맛을 보며 적극적으로 정답을 찾아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 전수가 아니라 제대로 된 가치를 판단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훌륭한 셰프가 되기 위한 최후의 조건은 ‘자기만의 가치’. 예술가가 작품에 가치를 담아 자신을 표현하듯 접시 위에 미각으로 가치를 보여줄 수 있어야 진짜 요리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를 내내 사로잡은 것은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간다’는 정신이다. CIA가 절대 휴교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고수하는 이유는 폭설로 도로가 마비돼도 가야 할 곳이 있으면 반드시 가야 하는 것이 셰프의 임무이기 때문. 모두가 파티를 즐길 때 일을 하고, 최고의 요리를 만들면서 샌드위치로 식사를 해결하는 셰프는 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스스로를 요리하며 또래의 피부가 아직 ‘레어’일 때 이미 ‘미디엄 웰던’이 돼버리는 노화촉진 직업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저들이 험난한 주방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주방에서만큼은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야구에서 완봉승을 거둔 느낌에 비유되는 서비스 직후의 성취감. 그 자부심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 비로소 진정한 셰프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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