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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女 "스펙 아무리 쌓아도…내 직업은 마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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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 “직업이 ‘취업 준비생’인 듯한 착각이 든다.” 취업 준비생 황인영(28)씨의 말이다. 황씨는 서울의 한 사립대를 졸업했다. 스펙이 부족한 듯싶어 토익(TOEIC)과 토익 Speaking 점수를 높이고 재무설계사 자격증인 AFPK도 땄다. 이력서가 비어 있는 게 싫어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다. 이른바 지원에 필요한 ‘기본 스펙’을 갖추는 데만도 적잖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자기소개서 빈 칸이 하나씩 채워질 때마다 취업문에 더 가까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2년째 ‘불합격’. 황씨는 “나이 때문에 입사가 더 어려워지는 느낌”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2. 지방대 사범대를 졸업한 뒤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는 방민영(29)씨는 12월만 되면 비정규직의 설움을 느낀다. 1년 단위로 계약하면 퇴직금을 줘야 한다는 판단에 대부분의 학교는 기간제 교사 고용을 3~12월로 못박았다. 1월 겨울방학과 수업일수가 적은 2월에는 선생님이 필요없다는 학교가 야속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방씨는 “집안도 어려운데 공부는 그만하고 기간제 교사라도 하라는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시작했지만 후회가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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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가 울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의 20대에게 ‘노동시장 진입하기’는 30세가 다 돼서야 가능한 장기 프로젝트다. 대학 졸업장과 영어 점수, 각종 수상 경력을 차곡차곡 준비해야 기본적인 지원 자격이 생긴다. 대학 진학률도 12.5%였던 베이비붐 세대와 달리 20대는 75.6%로 6배나 높다. 하지만 취업이 어려우니 졸업도 맘처럼 쉽지 않다. 2011년 대학생의 평균 재학 기간은 5년10개월이었다.

 대학 6년에 군대 2년, 취업 준비 2년을 투자해 높은 취업문을 통과한다 해도 회사에서 정년을 보장받기는 갈수록 어렵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은퇴 연령은 자꾸만 앞당겨지고 있다. 통계청은 30대의 경우 평균 59.8세에 은퇴하는 반면 20대는 56.3세에 은퇴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60대(69.6세)와 50대(65.3세)에 비해 10년 이상 앞당겨졌다. 여기에 1971년 10.4%였던 경제성장률은 2011년 3.5%로 30년 새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 50대가 맛봤던 ‘한 방’이나 ‘대박’도, ‘안정적인 투자 이익’도 20대에겐 그림의 떡이다.

 고용의 질도 떨어졌다. 2012 통계청 경제활동인구 조사에 따르면 20대 후반~30대 초반 근로자의 3분의 1은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정규직 임금의 61% 정도를 받는다. 매년 취업시장에 60여만 명의 대졸자가 쏟아지지만 대기업 채용 인원은 3만여 명에 불과하다. 불합격자는 다시 취업 준비생이 되거나 중소기업 또는 비정규직 취업자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고졸 학력으로도 번듯한 직장을 갖던 부모 세대 입장에선 이해하기 쉽지 않은 현실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80세 안팎인 평균 수명도 계속 늘어나 20대는 ‘100세 시대’를 살게 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전망이다. 하지만 지금의 20대에게 100세 시대가 반가운 소식만은 아니다. 30세까지 공부와 취업 준비에 시간을 보내고 길어봐야 30년을 일한 뒤 40년의 노후를 보내는 ‘30-30-40’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20대 초·중반에 취직해 40년을 벌어 20년 노후를 보내는 50~60대 부모 세대보다 10년을 덜 벌고 20년을 더 살게 되는 셈이다.

‘마이너스 세대’지만 소비 성향은 높아

 이들은 시작부터 마이너스 세대다. 잡코리아가 지난해 2월 대학 졸업예정자 77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67.7%가 “빚이 있다”고 답했다. 1인당 부채 규모는 평균 1308만원으로 전년보다 134만원이나 늘었다. 이들은 “빚의 84.4%가 대학 등록금 탓”이라고 했다. 이에 비해 2010년 20~30대 취업자의 월 평균 임금은 189만5000원이다. 생활비를 제외하고 매달 50만원씩 빚을 갚아나가도 최소 2년이 걸린다. 저축은 꿈도 꿀 수 없다. 취업자는 그나마 다행이다. 대출금을 3개월 이상 연체한 청년 채무 불이행자는 1만9520명, 이들의 대출액수만 1061억원에 달한다.

 초혼 연령이 늦어지거나 결혼 포기족이 늘어나는 연쇄 현상도 낯설지 않다. 남성의 초혼 연령은 27.9세에서 31.9세로, 여성은 24.8세에서 29.1세로 20년 새 4~5년 늦춰졌다. 취업이 늦어지면서 결혼은 엄두도 못 내는 현실 때문이다. 지난해 취업 포털 ‘사람인’ 조사에 따르면 20~30대의 53.5%는 “모아놓은 돈이 없어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고 답했다. “취업이 늦어져서”라는 응답도 33.1%를 차지했다(복수 응답). 3년차 직장인 김형민(32)씨는 “막상 결혼하려니 집값부터 결혼식 비용까지 만만찮다”며 “더 늦어지면 아이가 대학 가기 전에 환갑과 은퇴를 맞아야 할 것이란 불안감이 크다”고 말했다. 김씨는 “친구들끼리도 서로 ‘2포’(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사람) ‘1포’(출산 포기자)라 부르며 자조하곤 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높은 등록금과 청년실업 사이에서 오갈 데 없는 20대임에도 소비 성향은 오히려 부모 세대보다 강하다. 호황기에 성장한 세대인 데다 ‘봉급 생활자가 아무리 열심히 저축해도 집 한 채 사기 어렵다’는 체념이 더해진 까닭이다. 특히 갓 취업한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소비가 두드러진다. 2년차 직장인 박민석(31)씨는 취업 첫해 개인 스키를 사기 시작해 서너 달에 한 번씩 카메라나 자전거 등 레저 장비를 구입하고 있다. 친구들과 분위기 좋은 바에서 술도 한잔씩 하고 입사 후 해외여행도 두 차례나 다녀왔다. 박씨는 “한 달에 100만원씩 저축해도 1년에 1200만원인데, 10년을 모아도 서울 시내 전셋값도 안 된다”며 “지금 즐기는 게 그나마 행복한 길”이라고 말했다.

 박씨의 직장 동료 윤모(32)씨는 “1억원은 있어야 결혼을 할 텐데 아무리 빨라도 35세는 돼야 할 것 같다. 뒤늦게 애를 낳아도 대학 등록금을 어떻게 대야 할지 막막할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웬만큼 돈을 모아서는 어림도 없다는 체념이 청년들의 소비를 부추기는 셈이다. 이은미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소비 성향이 높은 20~30대는 월급 인상률보다 소비 증가율이 더 높다”며 “위기가 오면 소비를 급격히 축소하는 50~60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지금 20대 은퇴자금 7억7000만원 필요

 이들에게 닥칠 가장 큰 문제는 노후다. 30년을 벌어 40년을 살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 연금 수급 시기부터 늦어질 전망이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지난해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2025년까지 67세로 늦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55세에 은퇴한다고 가정하면 연금 수급까지 10년 이상 ‘마의 구간’이 찾아온다.

 전문가들은 상황이 낙관적인 건 아니지만 비관할 것도 아니라고 진단한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 20~30대가 30년 뒤 은퇴해 연금이나 저축만으로 40년을 생활한다면 ‘노인 복지’로 인한 세대 간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을 수 있다”며 “노년층이 일할 수 있도록 실버산업을 활성화하고 30세에 시작해도 70세까지 최소 40년은 일할 수 있는 사회로 새 판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30-30-40’에 변화를 줘야 한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100세 시대를 앞두고 있지만 우리의 노동 환경은 아직 준비가 덜 돼 있다”며 “20대 청년들의 취업이 늦어지는 만큼 늦게까지 일하는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령화로 노동인구가 줄어들어 정년이 연장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권기둥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 선임연구원은 “ 현대중공업과 GS칼텍스는 정년을 58세에서 60세로, 포스코는 56세에서 58세로 늘렸고 다른 기업들도 정년 연장을 신중히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년 퇴직이 50대 초·중반으로 빨라지더라도 고용 형태만 바뀔 뿐 경제활동에서 손을 완전히 떼는 ‘완전 은퇴’ 시기는 70세로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후를 위해 소비 성향을 줄이고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제안도 있다. 최은아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선임연구원은 “50대의 필요 은퇴자금이 3억8000만원일 경우 20대는 단순 계산을 해도 7억7000만원 정도가 된다”며 “이 때문에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적은 돈이라도 일찍부터 저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부동산이나 주식 등으로 ‘대박’을 터뜨리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며 “무리한 투자 대신 연금이나 적금을 꾸준히 붓는 방식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창업 등 대안에도 눈 돌릴 때

 정년이 있는 임금근로자가 아닌 창업도 대안이다. 20대는 물론 전 연령대에서 고루 창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영하 고벤처포럼 회장은 “일자리 나누기가 단기적 효과는 있지만 결국엔 스스로 일자리를 만드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며 “우리 사회가 아이디어만 있으면 창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의 구글 출신 직원들은 퇴사 후 경험을 살려 신생 중소 벤처기업을 만들고 후배들에게 창업 노하우를 전수한다. 창업으로 제2의 구글과 구글러 만들기를 이어가는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차례 실패해도 노동시장으로 돌아올 수 있는 문을 열어주는 게 중요하다. 금재호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창업하는 20~30대가 다시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우리 사회의 시급한 과제”라며 “이들이 느끼는 가장 큰 벽인 나이 제한 등을 아예 없애고 창업을 통해 쌓은 실패의 경험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취업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졸 채용 확대 등 학력 위주 사회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학벌과 스펙 쌓기에 치중해 취업 준비 비용을 과다 지출하는 세태를 막자는 의미다. 박근혜 당선인도 불필요한 스펙 쌓기를 방지하기 위한 ‘고용정책기본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일자리 중심의 직업교육을 활성화하고 이를 취업과 적극 연계해 고교 졸업 후 무조건 대학에 진학하는 추세를 바꿔보겠다는 복안이다.

 남재량 노동연구원 노동정책분석실장은 “학벌이 아닌 능력 위주의 사회로 가는 게 20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대책”이라고 강조했다. 남 실장은 “최근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학력이나 학벌을 보지 않고 선발하는 열린 채용이 늘면서 능력 있는 고졸자 취업이 활성화되고 있다”며 “최근 3~4년간 대학 진학률이 떨어지고 있는 것도 주의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능력 위주의 채용이 20대의 노동시장 진입 시기를 앞당기고 취업 준비 비용을 대폭 축소할 수 있을 거란 얘기다. 그는 “지금의 청년실업은 대졸자 수는 급증했는데 취업시장에서 고학력자에 대한 수요가 늘지 않아 생기는 불균형도 한 원인”이라며 “건강한 중소기업을 늘려 대졸자들을 최대한 흡수하도록 하는 데 정부의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채윤경·송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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