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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미스터리…삼국시대 저수지 맞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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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김제 벽골제는 삼국시대인 330년 조성됐다. 우리나라 고대 최대의 저수지로 알려져 있다. 최근 경제학계에서 방조제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진 김제시청]

벽골제(碧骨堤·사적 111호)는 저수지인가, 방조제인가.

지금 우리 학계에 흥미로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와 허수열 충남대 교수, 두 명의 경제학자가 벌이는 ‘벽골제 논쟁’이다. 두 학자는 모두 61세. 각각 경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같이 다닌 동기다.

하지만 이념적 지형에선 차이가 나서 흥미를 더한다. 우리 학계의 이념을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로 거칠게 분류한다면, 이 교수는 탈민족주의를, 허 교수는 ‘열린 민족주의’를 대변해왔다.

 ◆농경문화의 귀중한 자료=전북 김제시에 있는 벽골제는 삼국시대인 330년 조성된 우리나라 최대의 저수지로 알려져 왔다. 벽골제를 소개하는 김제시청의 안내문에는 ‘근대 이전 오천년의 농경문화가 살아 숨쉬는 사적’이라고 적혀 있다. 주변의 김제·만경평야와 함께 벽골제가 저수지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학교 역사시간에도 그렇게 배워왔다.

 이 같은 통념에 도전한 것은 이 교수다. 2007년 계간지 ‘시대정신’ 여름호에 소설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비판하는 글을 실으면서다. 소설의 무대인 김제·만경평야와 벽골제 관련 서술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벽골제는 농업용 저수지가 아니라 바닷물의 침입을 막는 방조제였다”며 새로운 이론을 내놨다.

아울러 “김제·만경평야 지대는 1900년대까지도 대부분 황량한 불모의 땅이었으며, 러·일전쟁 이후 들어온 일제가 간척사업과 수리사업을 전개하면서 농업지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영훈 교수(左), 허수열 교수(右)

 ◆5년 뒤의 반론=이 교수의 ‘벽골제=방조제’ 주장에 대해 허수열 교수가 반박을 하고 나섰다.

지난해 1월 저서 『일제 초기 조선의 농업-식민지근대화론의 농업개발론을 비판한다』를 통해서다.

허 교수는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과 함께 김제 일대 수리조합·토지개량·하천개수 관련 사료 등을 제시하며 “벽골제가 큰 규모의 저수지였다”고 주장했다.

 허 교수는 “벽골제는 저수지로 설립됐으나 저수지로 기능한 것은 극히 일부 기간에 불과했고 세종대 이래 일제 초까지 제방 일부가 파괴된 채 방치됐다”며 “김제·만경평야 지대는 일제의 개발 이전에 이미 조수의 침입에서 비교적 안전한 농업지대였으며, 일제의 개발에 의해 비로소 농업지대로 변모한 곳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유럽에선 어땠나=2013년 벽두 이 교수가 다시 비판의 날을 들고 나섰다. ‘경제사학’(53호)에 ‘벽골제=방조제’ 주장을 뒷받침하는 글을 발표했다. 허 교수에 대한 1년 만의 반격이다.

 이 교수는 논문 ‘혼란과 환상의 역사적 시공-허수열의 『일제 초기 조선의 농업』에 답한다’에서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벽골제를 저수지로 본다면, 오늘날 춘천 소양강댐보다 10배는 더 큰 면적이 나오는데, 4세기 초반에 그런 저수지를 만들어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럽에서도 간척사업이 활성화되는 것은 13세기에 와서다”라고 반박했다.

 『조선왕조실록』이 한글로 번역되기 전에 두 번이나 한문으로 통독했다는 이 교수는 “근대 이전 기록을 사료비판 없이 맹신해선 안 된다. 4세기 초 한반도 인구는 200만∼300만 명 수준이고, 아직 석기를 사용하고 움집에서 살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규모 농업용 저수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사람들이 벽골제를 저수지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로 10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토양이 쌓이는 충적 작용을 들었다.

그는 “벽골제의 정체는 향후 고고학·지리학·토목공학·수리공학 분야의 연구성과를 수용하며 풀어갈 문제다. 그럼에도 330년경에 해안을 막고 그 같은 방조제를 만든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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