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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자신의 인생, 좀 더 터프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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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홍준
논설위원

지난 한 해 동안 페이스북을 업무시간에도 당당하게(?) 할 수 있었다. 대학생들의 참신한 시각을 매주 토요일자 지면(대학생 칼럼)에 담아내는 일을 맡으면서 페북 페이지를 연 덕분이었다. 페이지 이름은 ‘나도칼럼니스트(www.facebook.com/icolumnist)’. 소위 ‘페북질’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 시초의 허망함을 알 것이다. 나 혼자 덩그러니 만든 페이지에 나 혼자 ‘좋아요’를 눌러본 그 느낌. 흠, 내가 첫 번째 회원이자, 손님이구먼. 이제 뭘 해야 하지?

 매주 대학생들의 글이 페북에 올라오면 그 글 가운데 잘 쓴 글 한 편을 선택해 오프라인 지면에 옮기는 일이 38주간 이어졌다. 그사이 나 혼자였던 ‘좋아요’는 이제 5000개에 이르렀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5000명의 친구가 함께하는 공간이다. 지난 10월 초엔 한 대학생의 글에 무려 1만4000여 개의 ‘좋아요’가 붙었다. 좋은 글 하나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혈관을 따라 파동 치듯 퍼져나가며 감동에 감동을 더하는 장면은 말 못할 정도로 짜릿했다.

 희한한 것은 이런 페북질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 생겼다는 점이다. 우선 소통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됐다. 보스가 부하 직원들에게 “자, 뭐든지 기탄 없이 말해보라고”라며 기회를 주는 걸 종전에 소통이라 여겼다면,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다. 소통은 호의를 베푸는 게 아니며,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실컷 떠들어 놓고 “자 이제 말해봐”라며 뒤늦게 여지를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소통은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누구의 얘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그의 생각에 반응해주는 것이다. 반응하려면 상대방과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처한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면 그가 던지는 말에 공감할 수 있고, 여기에 진심으로 반응할 수 있다. 여기서 반응이 반드시 ‘좋아요’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어떤 때는 상대방이 눈물을 쏟게 할 만큼 매서운 비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인격체가 공감으로 연결돼 있음을 서로 확인한다면 그때의 비판은 비난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0대의 민낯을 지켜본 것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내 손 안에 든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지금 당장은 잘 모른다. 특히 지금의 20대는 그럴 여유조차 없어 보인다. 초등학교부터 고교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치열한 입시 경쟁, 그 끝에 얻게 된 대학 입학. 그것도 끝이 아니라는 듯 이어지는 취업 전쟁. 옆을 돌아보면 빵빵한 스펙 갖춘 사람들에 비해 한없이 작아 보이고, 한두 차례 입사 면접에서 미역국을 먹다 보면 자존감마저 상실해 버리는 취업준비생들….

 부모들의 따듯한 보호 속에 성장한 20대가 왜 지금 주눅 들고, 위축될 수밖에 없는지도 깨닫게 됐다. 해마다 수십만 명씩 쏟아지는 대졸자에 비해 이들이 선망하는 대기업 문턱을 넘는 숫자는 3만여 명에 불과하다. 여기에 20대 근로자의 3분의 1이 직업 전선에서 비정규직으로 출발하는 게 현실이다. 자식들을 쳐다보며 갑갑해하는 부모 앞에서 얼마나 스스로를 왜소하게 여기겠는가.

 그래도 아름다운 20대 얼굴은 2012년 마지막 대학생 칼럼(본지 12월 29일자, ‘나를 의심하나요’)에서 봤다. 이정규 학생(동국대 사회학과 4학년)은 “자기 이유를 만들어가니 취업 준비기간을 인내할 수 있었다. 불안과 의심의 짐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이유를 품고 뚜벅뚜벅 걸어갈 우리 청춘들을 소망하게 됐다”고 썼다.

 이렇게 결국은 나에게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좀 더 터프하게 가야 한다. 지금 다소 거칠게 가야 나중에 뒤돌아봐도 볼거리가 있다. “추억이라는 것은 자신이 인생에서 무리한 일을 했던 순간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기진맥진할 때까지, 달릴 수 있는 만큼 달려 놓는 것이다.”(일본의 디자이너 나가오카 겐메이,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이너』, 아트북스 간)

 페친(페북친구)이 된 20대 친구, 그 친구의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