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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이조 중엽 말엽까지 인물중심으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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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광주에 숨어살며>
조국근대화의 여명기인물로서 들 수 있는 이는 80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한강가의 광주에 숨어서 천문·지리·의학·율산·경사 및 천주교 등을 연구하고 이러한 부문에 관한 많은 저서와 문인을 내놓은 실학의 혜성인 성호 이익이다.
이익은 사색당파 중 남인에 속한 여흥인대사헌 이하진의 셋째 아들로서 그 부친의 귀양고장이던 평안도 운산에서 숙종 7년(1681)에 참판 이후산의 딸을 어머니로 하여 낳아 자를 자신, 호를 성호라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당쟁이 가장 격심하던 숙종 초년에 허적을 영의정으로 하여 남인이 정권을 잡게되자 벼슬자리를 얻어 관리의 풍기를 다스리던 사헌부의 장까지 지내다가, 숙종 6년에 서인 송시열들에게 내몰려 운산으로 귀양갔었는데 이곳에서 그를 낳게한 후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둘째형에 글 배워>
이리하여 고자가 된 이익은 홀어머니의 품에 안겨 고향이던 광주 첨성리(첨성리=성호)로 돌아와 자랐다. 그는 둘째형이던 잠에게 글을 배웠다. 천성이 총명하고 재질이 뛰어나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 배우고 밤낮으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한번 읽은 것은 곧 외울 정도였다. 그는 성격이 굳세고 바르며 얼굴모습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수염을 길게 내렸으며 효성과 우정이 지극하였다. 그는 모든 책을 두루 읽고 전언왕사를 모두 외웠으며 시문을 잘 지어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일이 많았다.

<형은 곤장에 죽고>
이와 같이 학문과 덕행을 닦은 성호는 1705년 25세 때에 시행된 증광대과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응시서류에 기록된 성명이 격식에 어긋났다는 집권당 노론의 시비로 회시에는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그의 둘째형이던 진사잠이 이미 5년 전에 살해된 왕비인 장희빈을 두둔하는 글을 임금에게 올려 노론을 공격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곤장에 맞아 죽게되니 성호는 그 아버지가 또한 억울하게 당쟁에 희생된 일들을 아울러 생각하여, 이후는 다시 벼슬자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광주에 숨어서 독서에 몰두한 것이다.

<대인엔 인정으로>
조석으로 홀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는 이외에는 방안에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서 성현의 서와 정주(정주)의 서와 퇴계의 문 등을 숙독하고 거듭 참고하여 일자 일의라도 그릇된 것이 있으면 이를 밝혀 풀지 않음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의 몸을 닦음에는 엄하였으나, 사람을 대접함에는 인정과 예의가 두터웠으므로 선비들이 그를 존경하여 원근에서 글을 배우러 오는 이가 많았다.
이러는 사이에 성호는 35세 때에 홀어머니 마저 잃고 가재·노비를 종가에 뺏기게 되어, 갑자기 살림에 쪼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는 몸소 농사를 짓는데 힘써 먹을 것을 장만하는 한편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고자가 된 조카들을 자기 자식과 같이 돌봐주며 혼기를 잃은 친척들을 주선하여 혼인하게 하며 병자를 방문하고 노비들에게까지도 두터운 인정을 쏟았다.

<왕궁에 불러들여>
이러한 소문이 나라에까지 알려지자 학문을 사랑하며 당파를 없이 하려는데 온갖 마음을 쓰던 영조는 그 3년(1727)에 47세이던 성호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그에게 나라의 토목영선(영선)사무를 맡아보는 선공감의 가감역(가감역=종구품)자리를 주었다. 그러나 마음에 정한바가 있던 그는 이 벼슬자리를 한말로 사절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가, 더욱 군서를 문인들과 토론하며 저술에 몰두하였다.

<83세로 생애 마쳐>
이리하여 그의 집에는 저서가 가득 차게 되었는데 그는 영조 39년(1763) 83세의 고령을 맞이함에 즈음하여 임금으로부터 연로자를 우대하는 뜻에서 내려진 군정사무를 맡아보던 중추부의 첨지사(정삼품)라는 벼슬과 미포 등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명예벼슬조차 오래 누리지 못하고 그해 12월17일에 숨지었다. 그는 죽은 후 고종 4년(1867)에 우의정 유후조 등 많은 선비들의 봉청에 따라 그의 높은 학덕과 많은 업적을 포상하는 뜻에서 나라로부터 이조판사의 벼슬을 받았다.
그의 자녀로는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현감을 지내던 맹휴 하나만이 있었고 저자로는 경서성리학에 관한 대학질서·제경질서·근사록질서·사칠신강·관물편·백언해와 예의 등에 관한 가례질서·상위전후록·자복편과 음약에 관한 해동악부와 정치·경제에 관한 성호사실 곽우록과 시문을 모은 성호집이 있었다.

<빛나는 실학사상>
이러한 많은 저서가운데에서 그의 빛나는 실학사상을 엿볼 수 있는 책은 성호사설과 곽우록이다. 성호사설은 그가 평소에 연구한 결과와 문인들의 물음에 대한 생각을 그때그때 기록한 것으로서 천지문 3권 만물문 3권 인사문 11권 경사문 10권 시문문 3권 도합 5문 30권 30책으로 되어있다.
이 책은 너무 방대한데다가 기사가 중복된 곳도 많았으므로 그의 문인이던 순암 안정복이 이를 정리하여 읽기 쉽게 10권 10책의 성호사설류선을 만들었는데 이 유선은 이미 그때의 선비들 사이에 있어서조차 널리 애독되어 비판적이며 고증학적인 실학운동을 일으킴에 크게 이바지한 명저이었다.
곽우록은 우리나라의 정치전반에 걸친 시폐와 그 구제책을 논술한 일편책으로서 관리들이 정치를 잘못하면 콩잎(곽)을 먹고사는 농민들은 도탄에 빠지므로 초야에 있는 몸이 이를 걱정(우)한다는 뜻에서 지은 책이었다.
성호는 그의 오촌숙모부이던 유형원의 실학사상 개혁사상을 이어받고 이를 더욱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는 동양의 서적뿐만 아니라 배경으로부터 전래된 천문략·천문학강요·연방외기·태서수법·천주실의·주제군징 칠극 같은 서양의 학술사상관계서적도 통독하여 넓은 사안으로써 시폐의 구제책을 논술하였다.
따라서 그는 불교와 시유의 무실한 학풍을 배격하고 실증적인 학풍을 확립시켰다. 역사서술 태도에 있어서도 종래의 방법을 버리고 비판적 고증적인 파악을 중요시하였다.
일례를 들면『당쟁은 배고픈 사람(선비)은 많은데다가 멱을 밥(벼슬자리)은 한 그릇밖에 없기 때문에 생겨 둘이 넷이 되고 넷이 여덟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과거의 회수와 인원을 줄여 벼슬길을 엄격히 제한하고 무능한 관리를 도태하며 적재를 적소에 배치하여 오래 머무르게 하고 양반들도 벼슬길 아닌 다른 생업에 종사케 하여야 한다』고 절규하고있다.

<사치생활을 엄금>
그리고 그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식량을 증산하고 놀고먹는 사람을 없이하며 사치생활을 엄금하고 국민에게는 매호에 일정한 영업전을 고루 주어 절대로 매매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굶주림을 면하게 할 것 등을 제창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화폐의 통용은 사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상업의 제한도 주장하여 어디까지나 농업을 주로 한 봉건적 생산체제를 이상으로 여겼다.
성호의 실학사상은 그 문인들에게 계승되어 영·정조시대에는 실학의 전성기를 이루게 하였다. 그는 늙어 기운을 차리기 어려운 때에 있어서도 문인들이 찾아오면 선뜻 그들을 맞아 예모를 갖추고 그들의 의문을 풀어주며 그들의 재질에 따라 각각 성취하는바가 있게 하였다.
그의 문인으로서는 역사학의 안정복, 심리학의 윤동규·이중환, 경학의 이병휴, 시문 및 서학의 이가환들이 유명하였고 실학의 집대성가라고 말하는 다산 정약용도 간접적으로 그의 학풍을 이어받은 남인학자였다.<필자=문박·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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