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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천재가 천재를 만났을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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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좋아하는 만화가는 많지만, 한 명을 고르라면 『슬램덩크』 『배가본드』의 이노우에 다케히코(45)다. 견문이 넓지 않으나 첫 만남에 압도당한 건축물을 하나만 고르라면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성당)’다. 그리하여 이번 연말에 받은 가장 뿌듯한 선물은 이걸로 정했다. 만화가 이노우에가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설계한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의 자취를 돌아보고 쓴 여행기 『페피타(pepita)』(학산문화사)다.

 뭐라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마치 생명을 가진 듯 꿈틀거리는 건축물들을 남긴 가우디는 꽤 젊었을 때부터 천재성을 발휘했던 모양이다.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할 때 학장이 “우리가 천재에게 학위를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 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른 나이에 명성을 얻어 서른 즈음에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건물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설계자로 뽑히게 된다. 1882년 착공한 이 건물은 현재 130년째 공사 중이다.

『페피타(pepita)』 p28~29 이노우에가 그린 가우디.

 큰 기대에 비해 책은 다소 어수선하다. 에세이도, 일러스트집도 아니다. 이노우에가 가우디의 대표작인 구엘 공원이나 카사 밀라를 비롯해 가우디의 생가 등을 돌아보며 느낀 감상이 글과 그림으로 맥락 없이 흩어져 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이노우에가 이 여행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가 조금씩 드러난다. 힌트는 책 제목에 있다. ‘페피타’는 스페인어로 ‘과일의 씨앗’이란 뜻. 이노우에는 류머티즘을 앓던 어린 가우디가 주말을 보냈던 교외 별장과 인근 몬세라트 바위산에서 가우디의 ‘페피타’를 발견한다. 외로운 소년의 친구가 되어줬던 풀과 꽃, 작은 동물과 바위. 가우디는 그 안에서 자신이 향해야 할 길과 키워야 할 씨앗을 발견했을 거라고. 주변 경관에 신비하게 녹아드는 그의 걸작들은 그 씨앗이 자라 피워낸 또 하나의 자연이라고.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가우디는 말년을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틀어박혀 살다 초라한 행색으로 전차에 치여 숨졌다. 이노우에는 그의 삶에서 ‘신으로부터 받은 소임’에만 충실했던 장인(匠人)을 봤다. 그리하여 천재가 천재를 만나 내린 결론은 의외로 단순하다. “오로지 완수한다. 몰두한다. 즐긴다. 단순히 좋아하는 일에 열중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천재도 장인도 아니지만, 혹시나 하는 맘으로 새해에는 그의 다짐을 따라보기로 한다. “눈앞의 일에 자신을 바친다. 주어진 곳에서 전력을 다한다. 그 다음은 흐름에 맡긴다.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