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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면 마을 입구까지 침수 … 도곡동 일대엔 갈대밭 무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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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포동 토박이 이종서(79)씨가 양재천에서 사람들이 지게로 흙을 날라 둑을 쌓던 당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 이 둑은 밀가루 공사를 해서 쌓았어. 지게에 몇 번 흙을 지어 나무 상자를 채우면 돈 대신 밀가루를 줬어. 동네 사람들 보단 외지 사람들이 와서 이 일을 했지.”

개포동 일대에서 한평생을 산 이종서(79)씨가 양재천 양 가에 쌓인 둑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면 그물로 고기를 많이 잡았지. 물가 모래밭에 올라와 집에서 가져온 냄비에 잡은 고기를 넣어 매운탕을 끓여 먹고, 밥 해먹고 그랬다니까(웃음).”

개포동에서 양재천을 건너 간 도곡동 일대엔 갈대밭이 무성했다. “가을이 되면 갈대를 베어와 말려서 겨울철 땔감으로 쓰곤 했어.”

현 개포동 일대는 당시만 해도 지대가 낮았다. 비가 많이 오면 양재천 주변에 물이 차 올랐다. 이씨는 현 개포2동에서 태어났다. 자신을 포함해 5대가 살아 온 곳이었다. 당시 마을 이름은 ‘개포’였다. 80년대 중반, 젊은 시절을 보낸 고향땅이 국유지가 돼 환지를 받았다.

“지금 개포2동은 내가 살던 ‘개포’와 ‘한욜’ ‘산골말’이 합쳐진 곳이야. 개포는 70가구쯤, 한욜은 40여 가구가 살았지. 산골말은 제일 작았어. 20여 가구뿐이었으니. 내가 살던 곳은 비가 많이 오면 마을 앞까지 물이 찼어.”

그가 환지 받은 곳은 개포4동이었다. 2년 여 동안 잠시 일원동에 살다가 88년부터 개포4동에서 살고 있다. 예전엔 개포4동을 ‘밀미리’라 불렀다. 개포보다도 지대가 더 낮았던 곳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비가 오면 한강물이 밀려 들어오는 마을이라 해서 밀미리”라고 한다.

“개포에 살았어도 어렸을 때부터 밀미리에 자주 왔었어. 이곳은 마을 바로 입구까지 물이 차곤 했어. 물이 얼마나 찼으면 몸집이 큰 돛단배가 들어오고 그랬다니까. 양재천 주변에 농토가 있었는데 물에 잠긴 벼는 녹아 버리고 채소는 떠내려 가고 그랬어. 얕은 지역에서 농사 짓는 사람은 소출이 형편 없었지.”

밀미리를 포함한 현 개포동 일대 마을들은 논농사뿐 아니라 참외·수박·오이·토마토 농사를 지었다. 장마 때 물이 차 사람이 직접 농산물을 들고 갈 수 없는 경우 배에 실어 뚝섬에 내렸다고 한다. 이를 마차에 실어 시장에 가져가 팔곤 했다.

“밀미리엔 40여 가구가 모여 살았지. 지금 양재2동은 ‘동산말’이라 불렀는데 30여 가구가 있었어. 동산말 사람들이 마을 회의를 할 때는 밀미리로 와서 함께하곤 했어. 지금은 나뉘어져 있지만 예전엔 같은 밀미리였어. 동산말은 이름을 두 개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이 지역은 80년대 중반 구획 정리 사업이 이뤄지며 모습이 바뀌었다. 침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지대를 높였다. 그가 서울구룡초등학교 옆 언덕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예전에 이 언덕을 ‘밀뽕뿌리’라고 불렀어. 예전엔 더 높았지. 여기엔 뱀이 무척 많았다고. 85년 구룡초등학교가 막 생겼을 때 첫번째 교장이 와서 백반을 몇 포대 뿌렸어. 이후론 뱀이 사라졌지.”

그는 밀뽕뿌리 언덕 뒷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지 하나 없는 고사된 느티나무 한 그루와 높이가 22m, 둘레가 390㎝인 은행나무가 나타났다. 수령이 350년 이른다.

“다행히 은행나무는 살았지만 땅을 높이다 보니 느티나무가 죽었지. 3년 전엔 느티나무 옆에 능수화를 심었어. 꽃이 피면 예뻐.”

구획 정리 사업은 사람들도 떠나 보냈다. “예전 이곳에서 살던 마을 주민들 중 대부분이 다른 곳으로 나가 살고 있어. 지금까지 이곳에 사는 사람은 몇 사람 안돼. 그나마 개포향우회에서 가끔 만나 얼굴 보는 거지.”

글=조한대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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