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전투복' 입고 본회의 선 박근혜, MB계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⑥ 2006년 신촌 테러

2006년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대표로서 동분서주하던 박근혜는 5월 20일 오후 7시20분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 도착했다. 박근혜가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의 지원유세를 위해 연설차량에 오르려는 찰나 갑자기 나타난 괴한의 손길이 박근혜의 얼굴을 스쳤다. 박근혜는 오른쪽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테러범 지충호가 커터칼로 박근혜의 얼굴에 10㎝가 넘는 상처를 입힌 것이다. 벌어진 속살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상처는 깊었다.

 박근혜는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긴급 후송됐다. 박근혜는 응급실에서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유정복 비서실장을 “나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라며 안심시켰다. 박근혜는 두 시간여에 걸친 수술로 60바늘을 꿰맸다.

 수술을 받고 안정을 취하던 중 유 실장이 지방선거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하자 박근혜는 대뜸 “대전은요?”라고 물어 화제를 뿌렸다. 당시 대전은 염홍철 시장이 지방선거 직전 한나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으로 옮긴 상태여서 박근혜가 필승을 다짐하던 곳이었다. 실제로 박근혜는 5월 29일 퇴원하자마자 오른뺨에 테이프를 붙인 채 대전으로 달려가 불완전한 발음으로 한 표를 호소했다. 이런 박근혜의 투혼은 5·31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대전을 비롯해 서울·경기 등 광역단체 12곳을 휩쓰는 결과를 가져왔다.

⑦ 2007년 경선 승복

 2007년 8월 20일 오후 2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개표가 진행 중이던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 경선에서 대격돌을 벌였던 박근혜와 이명박이 함께 무대 위에 올라갔다. 당시 박근혜의 하얀색 재킷 오른쪽 주머니엔 후보 수락 연설문이, 왼쪽 주머니엔 경선 승복 연설문이 들어 있었다. 단상에 오르기 직전 박근혜는 유정복 비서실장으로부터 “지금까지 4분의 1가량 개표가 진행됐는데 대표님이 2000여 표 이기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유정복은 “절대 강세 지역인 충남·북과 강원은 아직 개표가 시작되지도 않아 당선이 확실해 보인다”는 관측도 곁들였다. 이 때문에 박근혜는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 뒤 개표에선 두 사람의 득표 차는 432표로 줄었고 이미 여론조사에서 박근혜가 2800여 표 뒤져 있었기 때문에 역전패가 확정됐다. 오후 3시50분쯤 유정복이 단상에 올라가 박근혜에게 “죄송합니다. 선거인단에서 이겼지만 여론조사에서 져서 결국 지는 것으로 나왔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순간 박근혜는 얼굴이 흐려졌지만 이내 담담해지면서 “안 된 거죠? 알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뒤 승복 연설에서 왼쪽 주머니에 있던 원고를 꺼내 또박또박한 어조로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한다. 경선 과정의 모든 일들을 이젠 잊어버리자. 이명박 후보님께서 반드시 정권 교체에 성공해 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당시 박근혜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긴 탓에 지금도 당시 이명박의 후보 수락 연설보다 박근혜의 연설을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다.

⑧ 2010년 세종시 수정 반대

 박근혜는 2010년 6월 29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세종시 수정안의 반대 토론자로 직접 나섰다. 2005년 4월 당시 당 대표 자격으로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한 지 5년2개월여 만에 본회의 발언대에 나선 것이다. 흔히 그의 ‘전투복’이라고 불리는 회색 바지 차림이었다. 박근혜는 짧지만 강한 어조로 한나라당 이명박계 의원들이 제출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세종시 문제는 미래의 문제다. 미래로 가려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며 약속과 신뢰의 정치를 강조했다.

 박근혜에게 세종시 문제는 조금도 타협할 수 없는, 자신의 정치 생명과 직결된 사안이었다. 박근혜는 야당 대표 시절이던 2005년 이재오·김문수 등 수도권 의원들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세종시법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당내 반발이 계속되자 박근혜는 그해 2월 23일 열린 의원총회에서 이 문제를 표결에 부쳐 찬성 46, 반대 37로 찬성 당론을 정했다. 그러나 의총 직후 열린 본회의에 한나라당 의원들은 불과 23명만 참석했으며, 이 중 8명만이 세종시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박근혜가 이 같은 정치적 위기상황을 감수하면서까지 세종시법을 지지한 이유는 국토균형 발전에 대한 철학 때문이었다. 결국 2010년 한나라당 박근혜계와 야당이 대부분 반대표를 던지면서 세종시 수정안은 105 대 164로 부결됐다. 그가 세종시 논란 과정에서 보여준 일관된 자세 덕분에 충청권의 민심을 붙잡을 수 있었고 이게 이번 대선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⑨ 2011년 비대위원장 취임

 한나라당은 지난해 8월 서울시 무상급식 투표 무산과 연이은 10월 서울시장 보선 패배로 심각한 위기 국면에 처했다. 박근혜의 당초 대선 구상은 2012년 4월 총선 국면에서부터 정치 활동을 재개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디도스 사건이 터지면서 결국 홍준표 대표 체제가 붕괴하자 박근혜는 어쩔 수 없이 2004년에 이어 또다시 당의 구원투수로 조기 등판하게 됐다.

 그가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하던 12월 19일은 공교롭게도 북한이 김정일 사망을 공표한 날이었다. 박근혜는 취임식 직후 북한 관련 긴급 회의를 주재하는 것으로 공식 임무를 시작했다.

 박근혜는 김종인·이상돈·이준석 등 기존에 당내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외부 인사들을 대거 비대위에 끌어들여 당의 체질을 바꾸려 했다. 올 1월 돈봉투 사건까지 터지면서 한나라당의 이미지가 회복불능 상태가 되자 박근혜는 아예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당의 상징색도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바꾸는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당 정강·정책에도 경제민주화 개념을 대폭 반영시켜 한나라당 시절보다 이념적 지표를 좌클릭 시켰다.

 4월 총선 공천은 당의 주류가 이명박계에서 자연스럽게 박근혜계로 넘어가는 계기가 됐다. 정권심판 여론이 뜨거웠지만 박근혜는 새누리당이 과거 한나라당과 다른 새 정치세력이란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이런 전략이 주효해 새누리당은 4월 총선에서 152석이란 예상 밖의 대승을 거뒀다. 12월 대선의 예고편이나 마찬가지였다.

⑩ 2012년 과거사 회견

 지난 8월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박근혜에게 최대 아킬레스건은 과거사 문제였다. 그가 유신·정수장학회 등의 문제에서 좀처럼 명쾌한 입장을 내놓지 못하면서 야권은 집중적으로 이 문제를 공격했다. 특히 인혁당 사건에 대한 ‘두 개의 판결’ 발언은 당내에서조차 “법적 인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후폭풍이 거셌다.

 이에 박근혜는 9월 24일 유신 시절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사과하는 긴급 회견을 열었다. 박근혜는 “정치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음은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민주주의 가치”라며 “그런 점에서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기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적과 과오를 반반씩 언급하던 입장에서 한걸음 더 나간 것이다. 그는 “국민이 저에게 진정 원하시는 게 딸인 제가 아버지 무덤에 침을 뱉는 것을 원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이날 회견은 그가 과거사 논란에서 탈출하는 전환점이 됐다. 박근혜는 이후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를 국민대통합위 수석부위원장으로 영입해 적극적으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를 추진했다. 그는 20일 대통령 당선인 대국민 인사에서도 “과거 반세기 동안 극한 분열과 갈등을 빚어 왔던 역사의 고리를 화해와 대탕평책으로 끊겠다”고 약속했다.

[사진=중앙포토]

[관계기사]

▶ 문재인 득표수 '1469만 표'에 손 내민 박근혜
▶ 소통 나선 박근혜, 국민대통합 어떻게?
▶ 박근혜, 4강외교로 첫걸음…미·중·일·러 대사 만나
▶ 박근혜 시대, 정부 조직 개편 방향은?
▶ 박근혜, 60세 정년 의무화·일자리 150만개 만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