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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팀 버튼 ‘크리스마스의 악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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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이미 개봉한 지 20년이 다 돼가는 이 영화를 다시 찾게 된 건 낙서 때문이다. 얼마 전 바람처럼 한국을 다녀간 팀 버튼(54) 감독이 서울 광장시장의 빈대떡집 벽에 남겼다는 그 낙서. ‘언젠가는 꼭 만나리라’ 기대했던 감독을 놓친 대신 그가 그림으로 남긴 ‘크리스마스의 악몽’ 주인공 캐릭터 잭이라도 다시 만나보고 싶어졌다.

 이 애니메이션, 다시 보니 참으로 슬픈 내용이다. 주인공 잭은 각종 괴물들이 모여 사는 핼러윈 마을을 지배하는 호박의 제왕이다. 하지만 매년 핼러윈마다 듣는 아이들의 절규가 이젠 지겹다. 어느 날 우연히 크리스마스 마을을 엿보게 된 잭, 이 마을의 밝고 생동감 있는 분위기에 매혹당한다. 음침함과 냉소가 지배하는 핼러윈 타운과 달리 형형색색의 불빛과 아이들의 웃음이 넘치는 크리스마스 마을. “이건 뭐지?(What’s this?)” 이 마을 사람들은 왜 다들 행복해 보이는 거지? 그 밝음을 질투한 잭은 크리스마스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며 산타클로스를 납치해버린다.

애니메이션 ‘크리스마스의 악몽(The Nightmare Before Christmas, 1993)’.

 자신이 만들어낸 많은 캐릭터 중 왜 잭을 빈대떡집 벽에 그렸는지 이해가 될 만큼 잭은 팀 버튼 감독을 똑 닮았다. 아버지와는 사이가 나쁘고 학교에서는 왕따였던 소년 시절, 감독은 상상 속의 괴물 캐릭터를 그리며 외로움을 달랬다 한다. 밝은 곳을 동경했지만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 산타클로스로 변장을 하지만 의도와 달리 아이들에게 겁을 주고 마는 잭처럼.

 아이들의 크리스마스를 망쳐놓은 잭이 “내가 무슨 짓을 했나. 난 정말 좋은 것을 주려 했을 뿐인데”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절절하다. 다가가고 싶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슬픔. 하지만 잭은 결국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다음 핼러윈 땐 아이들이 정말 무서워하도록 혼신을 바쳐보기로” 결심한다. 어울리지 않는 산타 코스프레 대신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역할이 있음을 깨닫는다는 꽤 긍정적인 마무리다.

 얼마 안 남은 크리스마스, 나만 빼고 다들 행복한 것 같아 우울하다면 서울 서소문의 시립미술관에 들러보길 권한다. 팀 버튼 감독의 상상 속에서 튀어나온 기괴한 캐릭터들을 모아놓은 ‘팀 버튼전(展)’이 열리고 있다. 하나같이 슬퍼 보이는 굴 소년, 검댕 소년 등을 보고 있자면 한 인간의 어두운 에너지가 어떻게 예술로 승화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단, 전시장에 유난히 커플 관람객이 많다는 소문이 들린다. 괜스레 동요 말고 내 안의 어둠을 단련하는 ‘정신수양’의 계기로 삼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