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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벤츠 여검사’ 판결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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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양선희
논설위원

법원의 판결이 상식을 거스르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법의 권위를 의심토록 만드는 건 작은 일이 아니다. 부산고등법원(제1형사부)의 일명 ‘벤츠 여검사’ 사건 무죄 선고를 둘러싼 민심에서 이런 경우를 본다. 사건 개요는 이렇다. 검사가 내연관계인 변호사에게서 벤츠 승용차와 법인 카드를 받아 쓰면서 애인이 연루된 사건을 동료에게 청탁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청탁 정황을 인정하면서도 벤츠 등은 ‘사랑의 정표’이므로 무죄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에 인터넷과 모바일은 시쳇말로 뒤집어졌다. ‘법의 잣대가 부러졌다’ ‘제 식구 감싸기’ ‘법원이 국민을 바보로 안다’ 등 판결에 대한 불신이 넘쳤다. 물론 대법원 판결이 남았으니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 판결로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상처를 입었다. 재판부에 아쉬운 대목은 많다.

 먼저 법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노력이다. 피고인은 ‘알선수재’로 기소됐다. 직무와 관련한 일을 잘 처리해 주도록 알선하고 대가로 금품을 받는 죄를 말한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벤츠와 법인 카드를 받아 쓰기 시작한 것이 사건 청탁(2010년 9월)보다 앞선 2008년이므로 청탁의 대가가 아니라고 봤다.

 그런데 대법원 판례를 잠시만 검색해도 알선수재의 대가성을 폭넓게 인정하는 판례들을 여러 개 찾을 수 있다. ‘알선자가 수수한 금품에 그 알선행위에 대한 대가로서의 성질과 그 외의 행위에 대한 대가가 결합되어 있는 경우 그 전부가 알선행위에 대한 대가로서 성질을 갖는다’(대법원 선고 2005도 4062), ‘알선과 수수한 금품 사이에 전체적·포괄적으로 대가관계가 있으면 족하다’(대법원 선고 2007도 8117) 등 적극적 해석을 위해 참조할 판례들은 많다.

 물론 좁게 해석하는 것도 판사의 재량이다. 한데 피고인은 검사였다. 벤츠는 둘째치고, 검사가 애인의 개인 카드도 아닌 변호사가 일하는 법무법인 카드로 샤넬 백을 비롯해 교통비·음식값·세탁비·피부관리·주방용품 구입 등으로 3개월여 동안 2300여만원이나 쓴 것을 ‘내연관계에 기한 경제적 지원’이라고 판단한 게 온당한 것이었을까. 게다가 당시 내연 변호사는 빚더미에 앉아 있었다. 이건 직업윤리로도, 상식으로도 용인하기 힘들다. 또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의 범죄는 사회적 파급효과가 크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더 높은 도덕적·사회적 의무를 요구한다. 그 죄에 대한 처벌도 사회적 의무를 고려했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사회 기풍(氣風)의 문제도 있다. ‘벤츠 선물을 못하는 전 세계 남성을 루저로 만들었다’는 반발처럼 통상적 범위를 벗어난 ‘사랑의 선물’의 용인은 위화감을 조성한다. ‘부유한 사람은 각계의 유력한 이성을 사귀면서 이를 이용해 이익을 챙겨도 합법적이냐’ ‘전문직 여성이 수십억 사기를 당한 내연남에게 보태 주지는 못할망정 거액의 금품을 받아내고, 공적 지위를 활용해 청탁한 게 사랑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등 많은 의문이 제기됐다. 이렇게 이 판결은 건전한 사회 기풍 진작에 나쁜 사례를 남겼다.

 언론은 웬만해선 판사의 판결 내용을 문제 삼지 않는다. 하급 법원에서 똑같은 혐의의 피고인들이 재판부가 다르다고 상반된 판결을 받은 경우도 그랬고, 법원의 미온적 대처 이후 보복살인으로 이어진 대전 지체장애 여성 사건에서도 문제를 제기하는 정도에 그쳤다. 다른 기관 같았으면 책임자 문책을 요구했을 거다. 이렇게 언론도 일단 법원 판단을 존중한다는 원칙을 지킨다.

 이는 법원이 전지전능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최후의 권위라서다. 이를 흔들어 버리면 사회질서 유지와 정의 수호를 위한 마지막 보루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판결에 대한 의구심과 때로 돌출하는 판사들의 실망스러운 행태에도 인내해 왔다. 상식과 법이 통하는 사회에 대한 국민적 염원이 법원의 권위를 지켜온 것이다. 판사가 법조문 문구만 따지는 ‘기능공’이 아니라는 믿음도 그 염원의 일부다. 한데 이대로 국민의 실망이 깊어져 ‘법원 개혁’ 목소리마저 나올까 걱정이다. 그런 불행이 없기만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