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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1500만의 환호 1400만의 멘붕 누가 이 골짜기 메울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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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비록 선거관리위원회 최종 집계는 아니더라도 그저께 방송3사 출구조사에서 50대 유권자 투표율이 89.9%로 나온 것에 정말 놀랐다. 나도 50대고 투표도 했지만,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17대 대선 50대 투표율(76.6%)은 물론 치열했던 16대(83.7%)도 저리 가라다. 병원에 입원 중이거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 외에는 모두 총출동하지 않았나 싶다. 혼자 자취를 하는 대학생 아들이 그제 오후 집에 들렀다가 ‘조용히’ 투표를 하고 갔다. 나도 아들도 서로 누구에게 투표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러나 20·30대의 투표 열기는 50대 이상에 비하면 아직 새 발의 피인 모양이다.

 투표일 아침 강원도 원주시에서는 투표하러 가던 88세 노인이 철길 건널목에서 열차에 치여 숨졌다. 경남 창원시에선 심근경색을 앓던 70대 할머니가 추운 날씨 속에 투표를 마치고 야외 화단에 주저앉아 있다가 병원에 옮겨졌으나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자식 집에 머물던 80대 후반의 가까운 집안어른도 며칠 전 “투표를 꼭 해야 한다”며 고향집에 돌아왔다. 18대 대선에 유례없이 세차게 불어닥친 노풍(老風)의 진원지는 과연 무엇일까.

 박근혜 당선인 1577만3128표, 문재인 낙선인 1469만2632표. 양쪽으로 쫙 갈라진 득표 수에 희비가 갈리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특히 패자인 문재인 후보가 얻은 표는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대통령의 득표(1149만 표)보다 320만 표나 더 많다. 그래서일까. 19일 밤 9시쯤 방송사들이 ‘박근혜 당선 유력’을 내보내기 시작하자 한 영화감독은 트위터에 “21일 지구가 멸망합니다. 그게 희망이에요”라는 글을 남겼다. 페이스북에도 탄식이 넘쳤다. “자고 나면 혹시 뒤집어질까 해서 일단 잤는데, 아침에 깨보니 똑같더라”는 글도 있었다. 한마디로 ‘멘붕’이었다.

 워털루 혈전에서 승리한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패배 다음으로 크나큰 불행은 승리”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의 피로스 왕은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피차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이긴 뒤 “이런 승리를 한 번 더 거두었다간 우리는 망한다”고 했다. 유명한 ‘상처뿐인 승리(Pyrrhic Victory)’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당선인이 어제 “저나 문 후보 모두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한 마음만은 같았다고 생각한다”며 화해와 대통합을 강조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권력의 세계가 낭만일색일 수 없고 일정한 주도세력이 필요한 것도 현실이지만, 그럴수록 금도(襟度)와 배려라는 미덕이 빛을 발하는 법이다. 패자와 지지층도 승자를 축하하고 일을 제대로 하도록 돕자. 아무리 뛰어난 리더십도 팔로어십(followership)의 뒷받침 없이는 이룰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글=노재현 기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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