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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사자는 죽어가며 초원을 살찌운다, 그게 세상 이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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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늙은 사자

죽음 곁에 몸을 누이고 주위를 돌아본다

평원은 한 마리 야수를 키웠지만

먼 하늘 마른번개처럼 눈빛은 덧없다

어깨를 짓누르던 제왕을 버리고 나니

노여운 생애가 한낮의 꿈만 같다

갈기에 나비가 노는 이 평화의 낯설음

태양의 주위를 도는 독수리 한 마리

이제 나를 드릴 고귀한 시간이 왔다

짓무른 발톱 사이로 벌써 개미가 찾아왔다

2012 중앙시조대상 대상을 받은 이달균 시인. 9년 전 신인상을 받은 데 이어 한국 시조단의 최고 영예를 안았다. [사진 조영래]

이달균(55) 시인은 끊임없는 실험을 해왔다. 자유시에서 출발해 시조로 발을 옮겼다. 사설시조집 『말뚝이 가라사대』에서는 해학과 풍자, 서사로 시를 풀어가는 도전도 했다. 여전히 자유시를 쓰는 것도 그런 초발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의 시를 관통하는 주제는 지역과 저잣거리다. 올해 중앙시조대상 대상 수상작인 ‘늙은 사자’도 그렇다. 지역은 ‘지금 이 곳’에 대한 관심이고, 저잣거리는 희로애락이 담긴 삶의 현장이다.

 “초원은 동물들의 저잣거리에요. 시의 영혼이 살아 있는 곳이죠. 그 공간에서 자연의 소멸과 생성에 관해 생각해 본 것이죠.”

 그가 요즘 읽고 있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사자를 통해 공포와 평화의 시간을 같이 생각해봤어요. 사자는 힘을 잃어가고 쓸쓸해지지만 그것이 초원의 평화를 상징하기도 하죠. 나비 한 마리가 갈기에 와 앉는 평화요. 사자는 죽어가면서 초원을 살찌우는 거름도 되고, 윤회의 모습도 담았죠.”

 이 시인이 꼽은 가장 대표적 시제(詩題)는 그가 오래 살았던 마산이다.

 “마산은 바다에 면한 작은 도시였는데 갑자기 인구가 늘면서 주택가와 학교, 환락가가 공존하게 됐어요. 그 속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이야기가 나를 지배했죠. 산업사회가 저무는 모습, 물질문명에 가려진 도시 문명을 시조로 형상화하고 싶어요.”

 이런 모습을 그려내는 데 시조는 적절한 장르다. “시조는 ‘시절가조(時節歌調)’에요. 말 그대로 시대의 노래인 셈인데, 리얼리티가 생명이죠. 현대인의 고통과 좌절을 담아야 시조도 생명력을 얻을 수 있어요.”

 시조의 가능성을 점치며 그는 “현대인이 짧은 글을 선호하는 만큼 시조는 미래에 가까운 형식”이라고 설명했다. 시조가 시의 본질에 다가서 있는 장르라는 자부심도 내비쳤다.

 “시조는 일탈하려는 원심력과 그를 형식 속에 제어하고 축약하려는 구심력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고 있죠. 3장6구의 제어 장치 속에 운율도 살아 있고 시가 지나치게 산문화하는 것도 막아주죠. 경계 위에서 누리는 언어 유희에요. 시의 전형에 맞는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구요.”

하현옥 기자

◆약력=1957년 경남 함안 출생. 87년 시집 『남해행』 출간하며 문단활동 시작. 95년 ‘시조시학’으로 등단. 2003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수상. 시집 『문자의 파편』 『장롱의 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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