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수의 세상탐사] 국운 가를 대선 패자의 성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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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호 31면

길고 거칠었던 12·19 대선이 끝나간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승부는 100만 표 안팎에서 판가름 날 가능성이 크다. 승자의 환호와 패자의 탄식이 벌써부터 들리는 듯하다. 과연 이번 대선 후에도 패자의 한(恨)풀이 정치는 계속될 것인가.

1993년 2월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장. 김영삼(YS) 정부가 시작될 때였다.

“우리가 저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취임식 연단 아래에서 박지원 당시 민주당 대변인이 곁에 있던 본지 취재기자에게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에 진입 중이던 ‘신진 정치인’의 얼굴엔 회한과 아쉬움이 가득했다고 한다. 권노갑·김옥두·한화갑을 필두로 한 동교동계는 ‘DJ 대통령 만들기’의 결사대였다.

92년 대선은 3파전이었다. YS와 DJ 그리고 정주영 국민당 후보가 맞붙은 선거에서 YS는 DJ를 194만 표(8%포인트) 차이로 이겼다. 그럼에도 DJ 진영은 호남을 발판으로 똘똘 뭉쳤고, DJP(김대중+김종필)연합을 성사시켜 97년 대선에서 재기했다. 그사이 5년간 YS 정부의 무능과 여야 극한 대치로 한국 경제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패자와 승자의 악연은 두 차례 대선에서 연패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97년엔 DJ에게 42만 표, 2002년엔 노무현 후보에게 57만 표 차이로 고배(苦杯)를 마셨다. 아들 병역비리 의혹과 온갖 네거티브 공세에 시달렸던 이회창 진영에선 ‘다 잡은 정권을 찬탈당했다’는 불복(不服)의 심리가 만연했다. 공·사석에서 ‘대선 사기극’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 우리 정치는 지역대결 구도와 좌우진영 논리가 지배하는 ‘삼류 집단’의 게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보스 정치’의 그늘 아래에서 선량(選良)이라는 국회의원들은 걸핏하면 멱살잡이와 해머 소동으로 국가 이미지를 추락시켰다. 이러다 선량이 아니라 ‘선랑(選狼·선거로 뽑힌 이리)’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판이다.

박근혜·문재인 두 후보는 대선 과정에서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몇 가지 공약을 내놨다. 바로 통합과 민생과 개혁이다. 87년 직선제 실시 이후 여섯 차례의 대선을 치르고야 여야 후보가 대선 이후를 함께할 ‘공약수’를 찾았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다. 누구든 외면할 수 없는 절박한 시대정신이다.

이제 대선 패자가 직접 한풀이를 하는 시대는 끝났다. 세상이 빛의 속도로 바뀌고 있어서다. 박·문 두 후보 중 누가 패하더라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인물이 있다. 2000년 미 대선에서 패배한 앨 고어(당시 52세) 민주당 후보다.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한탄을 뒤로한 채 그는 ‘환경 전도사’로 변신했다. 지구온난화 위기에 대처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한국 정치인 같았으면 대권 재수(再修)의 길을 걷고도 남았을 것이다. ‘앨 고어 효과’ 덕인지 몰라도 민주당은 버락 오바마라는 다크호스를 앞세워 2기 연속 집권에 성공했다.

앞으로 다가올 대한민국의 5년은 국운의 변곡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느냐, 아니면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에 빠져 고만고만한 중진국으로 살아남느냐 하는 갈림길이다. 저성장 쇼크를 이겨낼 방안은 요원하다. 게다가 북한의 김정은 체제가 또 다른 변수로 다가왔다. 장거리 로켓 ‘은하-3호’를 쏘아 올린 28세 지도자의 군사모험주의가 엄습하고 있다. 중국의 국수주의와 일본의 우경화는 차기 정부의 외교력을 끊임없이 시험할 것이다.

차기 대통령이 이런 난제들을 돌파하려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있다. 바로 승자 독식의 유혹을 떨치고 패자의 몫과 공간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협·상생의 정치를 해나갈 첫째 조건이다. 대선 승리의 강을 건넌 뒤 자신이 타고온 ‘뗏목’을 불살라 버릴 용기도 필요하다. 또 하나, 지금 당장 ‘네거티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흑색선전과 음모론을 동원해 승자가 된들 온전히 국정을 장악할 수 있겠는가. 한 맺힌 패자의 발목 잡기는 결국 대한민국의 국운을 떨어뜨릴 것이다.

역대 정권들은 입으론 통합과 화해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그것은 ‘이너 서클’끼리의 구호이기 일쑤였다. 지금까지 우리가 ‘절반의 대통령’밖에 갖지 못한 이유다. 박근혜·문재인 후보가 이제라도 절반의 유혹을 뛰어넘길 간절히 기원한다. 성공한 대통령을 위해선 성공한 패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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