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 항쟁기 때 일본인 상인들이 터를 잡은 곳은 혼마치(本町:충무로) 진고개 일대였다. 언론인 정수일(鄭秀日)은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식민지 부호들 ⑦ 백화점 부자
고종 21년(1884) 일본이 남산 밑의 왜성대(倭城臺:중구 예장동~회현동)로 공사관을 옮긴 뒤 일본인들이 밀려들면서 터줏대감이었던 조선 선비들을 밀어냈다. 왜성대는 임란 때 왜장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가 주둔했던 곳으로서 을사늑약 후 조선통감부를 설치해 도요토미 히데요시(<8C50>臣秀吉)의 숙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혼마치 일대에 일본 최대의 백화점인 미쓰코시(三越:현 신세계 자리)를 비롯해 조지야(丁子屋:현재 롯데 영플라자), 미카나이(三中井), 히라다(平田) 등 식민지 시대 4대 백화점이 들어섰다. 1930년대 진고개에 들어서면 조선이 아닌 일본으로 여행 온 듯한 느낌이 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백화점과 상점들이 즐비했다.
일본 상인들은 고객으로 일본인은 물론 한인도 유혹했다. 정수일은 앞의
그러나 우세한 자본력의 일본인 상점들이 점차 북촌까지 잠식하면서 한국인 상점들은 동대문과 서대문 쪽으로 밀려나는 형세였다. 정수일은 “그곳(일본인 백화점)에 조선 동포의 발이 잦아지고 수효가 느는 정비례(正比例)로 종로거리 우리네 상점의 파산이 늘고 우리 살림은 자꾸 줄어든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의 친절한 상술과는 달리 조선 상인들의 경우 “물건 파오” 하면 “여기 있소”라는 재래식(在來式) 방식인 것도 파산의 한 원인이라는 뜻이다.
최남, 은행원 하며 인사동에 잡화점 열어
언론인 신태익(申泰翊)이
이런 조선 상계(商界)에 혜성같이 등장했던 두 상인이 동아부인상회(東亞婦人商會)의 최남(崔楠)과 화신상회(和信商會)의 박흥식(朴興植)이었다. 당초에는 신태익이 “화신상회나 동아부인상회를 가리켜서 백화점이라고 부를 용기가 안 난다”고 언급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지만 여러 가지 상식을 파괴하는 독특한 상술로 재계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1895년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한 최남은 편모(偏母)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라면서 보성(普成)중학교를 겨우 마쳤다. 그후 금광왕의 꿈을 안고 일본의 아키타 광산(鑛産)학교에 다니다가 귀국해서 광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장공성백만골(一將功成百萬骨:한 장수의 공은 백만 병사의 유골이 만든 것)’이란 말처럼 누구나 최창학·방응모·김태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광산을 그만둔 최남은 운 좋게 조선상업은행에 들어가 은행원이 되었다. 최남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인사동 입구에 덕원잡화상(德元雜貨商)을 열고 투잡 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누이동생이, 밤에는 동대문 지점에서 퇴근한 최남이 운영했다. 그러다 최남은 남들이 선망하던 직장인 은행에 사표를 내고 상업에 전념했다. 최태익은 “남이 생각하지 못한 점에 착안하는 것이 최남의 특장(特長)”이라고 평가했는데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서울 다른 지역 4, 5곳에도 덕원상회 지점을 냈으며 경영난에 빠진 동아부인상회를 인수한 후에는 대구·광주·순천 등 지방 7~8곳에도 지점을 내는 새로운 경영기법을 선보였다. 배후에 권모(權某)라는 자산가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최남은 단순히 남의 도움으로 성공한 상인이 아니었다. 그는 1934년 9월호
그러나 종로의 조선 상인들은 최남을 배척했다. 소매상조합(小賣商組合)에서 최남을 제외시킨 것이다. 그것이 최남에게는 전화위복이 돼 1926년 순종의 인산 때 기록적 매출을 올렸다. 순종 인산 때 포목상조합(布木商組合)·소매상조합 같은 단체에 대여(大輿)를 멜 자격을 주는 바람에 덕원상점이나 동아부인상점 점원들은 배제되었다. 전 시가가 철시한 인산날 심심해진 최남이 상점 한 귀퉁이를 열자 지방에서 올라온 조문객들이 밀려들어 삽시간에 4000여원의 매상을 올렸다. 금곡(金谷)까지 다녀온 다른 상회 점원들의 발이 부르터서 문을 닫은 다음날에도 최남의 상점만 열었는데, 동아부인상회에서만 하루에 2만4000원이란 기록적 매출을 올렸다.
박흥식, 화신百 화재 뒤 최신 건물로 재건
최남은 일본인 백화점에 맞서기로 결심하고 1931년 종로에 동아(東亞)백화점을 열었다. 민영휘의 셋째아들 민규식 소유의 최신식 4층 건물을 화신상회의 박흥식과 경쟁 끝에 연간 2만 원에 임대했다. 최남은 백화점 점원 200여 명 중 70∼80명은 여점원으로 충당했다. 그래서 문방구 판매대의 여직원과 도쿄 유학생 출신이 혼인까지 하는 로맨스를 낳아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1932년 7월 조선호텔에서 박흥식과 회동한 최남은 동아백화점을 박흥식에게 매도하겠다고 발표해 큰 충격을 주었다. 박흥식은 이때 겨우 29세였다. 박흥식의 조부는 평안도 용강의 천석꾼이었지만 부친 때는 겨우 먹고살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고 전해진다. 용강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미곡상과 인쇄업을 하던 박흥식은 24세 때 서울로 올라와 황금정(黃金町:을지로)에 선일지물회사(鮮一紙物會社)를 설립하면서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태익은 동아백화점을 매도한 이유에 대해 1년에 7만원 정도 손해를 보자 후원자 권모(權某)가 손을 뗐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여점원 덕분에 사람은 북적거렸지만 매상은 시원찮았던 것이다. 신태익은 ‘박흥식의 배후에는
그러나 박흥식은
1935년 화신백화점 대화재로 50만원의 손실이 발생했지만 1937년에는 지하 1층, 지상 6층의 최신식 건물을 준공해 남촌의 일본인 백화점에 당당히 맞서면서 “조선에선 박흥식이 실업가로는 제1인자”라는 말을 들었다. 박흥식은 미모의 부인 계씨(桂氏)와 재혼했는데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의 주례에다 혼인식 장소가 비행기여서 다시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박흥식은 계동에 조선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조양절충(朝洋折衷)의 화려한 저택을 지었다. 그의 저택에는 자동차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그러나 일제가 군국주의로 치닫던 1940년대에는 동양척식회사 감사가 되고 조선비행기회사를 설립했다가 해방 후 반민특위에 구속되기도 했다. 군수산업으로 성장하려 했던 식민지 기업인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