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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 사망 조선인 134명 야스쿠니에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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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944년 6월 민준식(당시 23세)씨는 부산항에서 이오지마(硫黃島)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일본군 109사단에 소집됐다는 징집영장을 받고 나서였다. 그가 이오지마에 도착하자 전운이 감돌았다. 수비대 사령관 구리바야시 다다미치(栗林忠道) 중장은 몇 개월 뒤 벌어질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섬 곳곳에 지하 땅굴을 파는 등 군사기지로 만들었다.

 1945년 2월 19일 미군은 2시간에 걸쳐 폭격을 퍼부은 뒤 섬에 상륙했다.

 전세가 미군 측으로 기울자 그해 3월 21일 구리바야시 중장은 본국에 “탄환이 동나고 물이 고갈돼 최후의 결전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황국에 영원한 이별을 고한다”는 결별 전보를 보냈다. 두 달간의 치열한 전투로 일본군 2만219명, 미군 6821명이 전사했다. 일본군에 징집된 민씨를 포함해 조선인 출신 군인 22명도 전원 사망했다. 또 군무원으로 동원된 사실이 확인된 조선인 178명 중 115명이 숨졌다. 대부분 미군과 교전 중에 숨졌다.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장 박인환)는 “이오지마 강제동원 실태에 대한 기초조사 결과 군인·군무원으로 조선인 200명이 동원됐으며 이 중 137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9일 밝혔다. 이오지마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실태 조사가 나온 것은 처음이다.

 이번 조사 결과에 따르면 숨진 조선인 군인 22명은 이미 지원병으로 일제에 징집됐다가 제대한 재향군인(예비군) 신분이었다. 하지만 전세가 악화되자 일제가 재소집했고, 결국 이오지마에서 모두 전사했다.

 당시 군무원이었던 박찬희(나이 미상)씨가 “당시 이오지마에 동원된 군무원도 작업 도중 전투훈련을 했다. 1944년 여름부터 공습이 격렬해지면서 작업 중 사망한 군무원도 적지 않았다”고 밝힌 기록도 있다. 일제는 사망자 전원을 ‘옥쇄(玉碎)’ 처리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다. 옥쇄란 명예나 충절을 위해 깨끗이 죽는다는 의미로 일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표현이다. 이들의 미지급 급여에 대한 공탁금은 580엔(약 7620원)에 불과했다.

위원회는 일본 구해군군속신상조사표를 확인한 결과 조선인 군무원 사망자 115명도 야스쿠니 신사에 일괄 합사 처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오지마에서 사망한 조선인 137명 중 유골이 봉환된 3명을 제외한 134명의 유골은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위원회 관계자는 “이오지마에서 사망한 137명 중 134명의 유골이 아직 송환되지 않았다”며 “지난 4월 일본 정부가 이오지마에서 벌이고 있는 유골 발굴 작업에 한국 정부의 공동 참여를 제안했으나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오지마(硫黃島)=일본 남동쪽에 있는 면적 20㎢의 작은 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수도 도쿄와 미군 기지가 있던 사이판의 가운데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 . 1945년 2~3월 일본군 2만219명, 미군 6821명이 전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를 소재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등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또 미 해병대가 섬에서 제일 높은 스리바치산(摺鉢山·161m) 정상에 성조기를 꽂는 모습을 담은 조 로젠털 AP통신 기자의 사진(사진)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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