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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 반한 한국<65·끝>일본인 시부야의 K팝 방송 체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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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경주에서 개최된 한류드림콘서트 현장.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팬이 K팝 스타를 향해 환호하고 있다. [한국방문의해위원회]

나는 K팝 팬이다. 본업은 일본의 대학교 준교수다. 한국으로 치자면 부교수다. 3년 전 ‘동방신기’에 빠져 한국 대중음악을 연구하게 되면서 지난 3월 서울에 왔다.

한국에서 내 연구 활동 중 하나가 TV 가요 프로그램 방청이다. 지금까지 네번 도전해 세번 방청에 성공했다. 그러면서 방송국 문턱을 넘기까지의 부단한 절차가 K팝 팬을 얼마나 강하게 단련시키는지 새삼 절감했다. 한국인 친구도 “딴 나라 얘기 같다”며 깜짝 놀랐다.

1 동방신기 응원 도구. 응원봉은 한국 팬이 선물했다. 방청할 때 응원봉은 사용 금지여서 대신에 풍선을 사용한다.

‘빠순이’란 스타의 열렬한 여자 팬을 뜻하는 한국어다. 어원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소녀 팬이 남자 스타를 부르는 호칭 “오빠!”의 ‘빠’와 여자 이름에 자주 쓰이는 ‘순’과 애칭에 흔히 붙는 접미사 ‘이’를 합쳐 만들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스타를 ‘오빠’라고 부를 수 없는 누님 팬도 자조적으로 자신을 ‘빠순이’라고 인식한다. 나도 그 중 한 명이다.

한국에서 가요 프로그램을 방청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방송국 홈페이지에서 직접 신청하는 것이다. 신청이 간단하고 당첨 시 방청이 보장되지만 경쟁이 심해 성공률이 낮다. 둘째는 좋아하는 가수의 팬클럽을 통해서다. 스타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대신 시간과 품이 엄청나게 든다. ‘엄청나게’가 어느 정도냐고?

지난달 21일 진행된 SBS ‘인기가요’ 녹화 현장을 예로 들겠다. 이날은 당일 TV에 나갈 생방송과 2주 뒤 방송분의 사전 녹화가 예정돼 있었다. 21일 방청을 위해 나는 전날부터 방송국으로 향했다. 방송국 앞 길바닥에 붙은 팬클럽 알림판을 찾아 얼굴을 들이밀고 ‘인증샷’을 찍었다. 팬클럽 지정 전화번호로 사진과 이름을 전송하자 잠시 뒤 문자가 왔다. 선착순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날 오후 9시30분 두 번째로 방송국에 갔다. 문자로 받은 번호 순서대로 줄을 섰다. 팬클럽 담당자가 출석체크를 하고 유성펜으로 손목에 번호를 써줬다. 내 몸에 번호가 적히는 경험은 그리 흔치 않아서 가축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2 한국 가요 프로그램 방청에 필요한 인증 샷. 바닥에 붙어있는 팬클럽 알림과 얼굴을 함께 촬영해 현장에 온 것을 증명해야 한다. 3 지난 10월 동방신기 6집 발매 기념 사인회에서 받은 사인. 보물이다.

방청 당일 오전 11시 또다시 다른 방청 신청자들과 방송국 앞에 모였다. 손목 번호만 확인하고 해산했다.

오후 2시 30분, 방송국에 가서 손목의 번호대로 줄을 섰다. ‘인기가요’ 방영 시간은 오후 3시 40분. 순서가 빠른 20명만 생방송을 구경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나머지는 그냥 뿔뿔이 흩어졌다.

오후 5시 방송국 앞에서 다섯 번째 집합했다. 별난 절차가 진행됐다. 일단 손목 번호대로 줄을 선 뒤 팬클럽 내부 기준에 따라 다시 줄을 섰다. 동방신기 공식 팬클럽의 경우 동방신기 음반을 사고, 음원을 다운로드 받고, 휴대폰 통화 연결음을 동방신기 활동곡으로 설정한 회원에게 우선권이 돌아갔다.

조건을 충족하면 누구든 혜택을 봤으나 반대의 경우는 가차없었다. 선착순 1번이 기준 미달로 입장순서 300번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이틀 전 KBS ‘뮤직뱅크’ 녹화장에서는 전날 비행기로 날아와 누구보다 먼저 알림판 ‘인증샷’을 찍은 일본 팬이 순서에서 밀리고 밀려 결국 방송을 못 보고 귀국하는 무서운 일을 당했다고 한다. 다행히 나는 녹화 직전 무사히 SBS 방송국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한번 방청을 위한 무려 다섯 차례의 집합. 두 번째와 세 번째 집합이 최대 수수께끼였다. 대체 우리는 왜 모였던 걸까? 팬클럽의 한국인 친구도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고민했다. K팝이 세계로 퍼지고 해외에서 팬들이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지금 이렇게 번거로운 절차를 고수하는 이유가 뭘까.

최근에야 그 답을 깨달았다. 이건 ‘끈기의 시험’이다. 언뜻 무의미한 절차를 반복함으로써 진정성 있는 팬만을 골라낸다. 동시에 방청의 순간 뜨거운 반응까지 끌어낼 수 있다. 오랜 기다림으로 가슴에 응축된 감정이 사랑하는 ‘오빠들’의 등장과 함께 뜨겁게 분출되는 원리다. 한국의 매니지먼트사와 팬클럽은 매번 이런 식으로 국가대표급 ‘빠순이’를 육성하는 게 아닐까.

‘힘들면 방청을 안 하면 될 게 아니냐’는 말도 종종 듣는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도 동방신기의 아름다운 모습을 코앞에서 보고 싶다. 다만, 가능하면 편하게 보고 싶다. 발 시리게 추운 계절이다. 찬바람을 맞으며 몇 시간이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건 생각만 해도 몸이 괴롭다. K팝의 세계적인 수준에 어울릴 만한 합리적인 방청 방법이 하루빨리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리=나원정 기자
 중앙일보·한국방문의해위원회 공동 기획

시부야 도모미(澁谷知美) 1972년 일본 출생. 도쿄경제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는 준교수다. 2009년 일본 남학생의 역사를 연구하다 한국 아이돌 스타에 빠지면서 한국 대중음악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국을 12차례 방문한 뒤 지난 3월부터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방문학자 자격으로 K팝의 현장 서울에 장기 체류하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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