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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글러브 끼는 강남 직장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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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복싱 삼매경에 빠진 박채준(왼쪽)씨와 임성환씨. 샌드백을 사이에 두고 복싱 자세를 취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도심 속 빌딩 숲 사이로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직장인들의 자유 시간이 임박하자 주섬주섬 글러브를 챙기는 사람들이 있다. 야근을 하는 날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복싱 클럽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체력은 중요한 경쟁력이다.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복서로 변신하는 강남 사람들을 만나봤다.

글=김록환 기자 , 사진=김진원 기자

“줄넘기와 윗몸 일으키기로 땀부터 내고 핸드랩(손을 보호하는 붕대)을 감고 있으면 묘하게 두근거려요. 하루 일과가 아무리 힘들었어도 이 시간만큼은 행복합니다.” 직장인이자 3개월차 복서인 임성환(34)씨는 오늘도 퇴근하자마자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한 복싱클럽의 문을 열었다. 퇴근 후 스트레스를 맥주 한 잔으로 푸는 동료들과는 달리 땀내음 가득한 체육관으로 향한 것이다. 멋진 넥타이와 깔끔한 양복을 벗고 투박한 글러브를 낀 채 헐렁한 체육복으로 갈아입는다. 헤드기어(머리 보호대)를 착용하고 주먹을 몇 번 휘두르며 몸을 푸는 그는 완연한 복서의 모습이다.

 그의 이중생활은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시작된다. 팔, 무릎, 허리에 이르는 주요 신체 부위를 가볍게 풀어준다. 이후 3분씩 5회에 걸친 줄넘기를 한다. 쌀쌀한 겨울 날씨지만 이 과정만 거쳐도 금새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한다.

  체육관 한 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임씨가 갑자기 거울을 바라보고 혼자 주먹을 휘두른다. 마치 누군가와 격렬하게 복싱을 하는 느낌이다. 뭘 하냐고 물으니 임씨는 말없이 웃어 보인다. 10여 분에 걸친 격렬한 몸짓이 끝나자 그는 한 숨 돌리며 입을 열었다. “기본 체력 훈련이 끝나면 반드시 쉐도우(가상의 상대와 경기를 하는 복싱 훈련법)를 해야 해요. 이제 샌드백을 쳐야 하는데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죠.” 쉴 틈도 없이 임씨는 천장에 매달린 샌드백을 두들긴다.

 임씨와 같은 과정을 거치며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박채준(39)씨도 마찬가지다. 거의 매일 퇴근 후 복싱클럽으로 향하는 그는 7개월 동안 열심히 훈련 중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복싱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살이 통통하게 올라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느낀 박씨는 망설임 없이 글러브를 잡았다. 복싱을 시작하고 14㎏이 빠졌다는 그의 몸은 온통 근육으로 가득했다. ‘남자의 로망’이라 불리는 복싱 덕분에 삶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박씨는 “예전에는 아침마다 일어나기 힘들고 몸도 무거웠는데 이제는 매일 체력이 늘어나는 느낌을 받습니다”라며 “무슨 일을 하든 자신감이 붙고 활력이 넘쳐서 주변 사람들한테도 같이 하자고 권유하는 중입니다”라고 말했다.

개인교습 받아 3개월이면 취미 복싱 완성

임씨와 박씨처럼 복싱을 자신만의 재테크 수단으로 활용하는 직장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1980년대의 ‘복싱 붐’이 최근 몇 년 사이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고되고 반복적인 훈련 대신 쉽고 재미있게 다양한 동작을 익힐 수 있다는 매력이 가장 큰 원동력이다. 좁은 공간에서 별다른 고가의 장비 없이 즐길 수 있는 운동이라는 점도 한 몫 한다. 3~5만원이면 글러브 등의 기본 장비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SG복싱클럽에는 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다. 직장인부터 학생, 주부, 은퇴한 가장에 이르기까지 구성원도 다양하다.

이들에게 복싱의 재미를 가르치는 SG복싱클럽 박상재(31) 대표는 복싱을 생활체육으로 알리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 강남구생활체육복싱연합회 회장이기도 한 그는 복싱의 장점으로 철저한 1:1 개인 트레이닝 위주라는 점을 꼽는다. “기본적으로 1시간 동안 스트레칭, 기본기, 미트치기, 스파링을 하게 되는데 정해진 순서에 따라 꾸준히 연습을 거듭한다면 실력이 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무엇보다 복싱은 생각보다 거칠고 어려운 운동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복싱클럽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체중 감량, 체력 증진 등의 건강관리 목적으로 찾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전문적으로 선수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면 3개월이면 취미 복싱을 완성할 수 있고 6개월이 지나면 테크닉 숙달이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성환씨, 채준씨. 스파링 한 판 부탁해요.” 박 대표의 스파링 권유에 두 직장인은 주먹을 교차하며 오늘도 매섭게 눈빛을 교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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