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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제미니호 선원 4인 … 구출 순간 재구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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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제미니호의 항해사 이건일씨(왼쪽)가 5일 김해공항에서 부인 김정숙씨와 포옹하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태극마크가 선명한 헬기에서 내려온 구명줄, 그건 어릴 적 동화책에서 읽던 하늘나라에서 내려준 동아줄과 같았습니다.”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됐다 풀려난 제미니호 선장 박현열(57)씨는 구출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흥분 어린 어조로 말했다. 5일 한국에 돌아와 가족의 품에 안긴 박 선장 등 4명은 해적으로부터 풀려난 뒤에도 구조 과정에서 또 한번 목숨을 잃을 뻔한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1일 석방금을 담은 돈가방이 해적의 근거지로 투하됐다. 박 선장 등 피랍자 4명이 두 차례로 나뉘어 해적 근거지에서 20여㎞ 떨어진 해안으로 풀려난 것까지는 모든 일이 당초 시나리오대로였다. 하지만 선원들을 태우러 온 구명보트는 2시간 동안 멀리서 맴돌 뿐 해안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악천후로 인해 3m가 넘는 높은 파도가 계속된 탓이다.

 참다 못한 선원들은 바다에 뛰어들었다. 1등항해사 김형언(57)씨는 “저 배를 타면 살고 놓치면 지옥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선원들은 파도를 헤치며 사투를 벌였다. 1등항해사 이건일(63)씨는 “몇 번이나 파도에 휩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말했다. 결국 구조선도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방향을 돌렸다. 선원들도 해안으로 되돌아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해적과의 사이에 통역을 맡았던 소말리아인에게 “노를 저어서라도 갈 테니 배를 빌려달라”고도 사정했지만 거부당했다. 바로 그 순간 청해부대 강감찬함에서 급파된 링스헬기가 해안가로 굉음을 내며 나타났다. 선원들은 구명줄을 타고 무사히 헬기에 오를 수 있었다.

 선원들은 “582일간의 피랍 생활은 지옥 그 자체였다”고 입을 모았다. 해적 본거지로 끌려간 뒤 2명씩 나뉘어 가축우리 같은 곳에서 생활했다. 벌레와 각종 이물질이 섞인 물을 러닝셔츠로 걸러 먹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쌀을 소금과 버무려 먹었다.

 해적들은 가끔 선원들을 불러냈다. 처음엔 “아, 이제 마지막이구나”라며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는데 알고 보니 가족이나 선사 측에 “빨리 석방금을 보내라”는 전화를 시키기 위해서였다. 통화 도중엔 위협사격을 하거나 폭행을 하며 극도의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이건일씨는 영어로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왼쪽 뺨을 맞고 일주일 동안 소리가 들리지 않기도 했다. 기관사 이상훈(58)씨는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가족들에게 해적들을 대신해 협박 전화를 거는 것뿐이었다”고 말했다.

 살아 돌아갈 기약이 없는 나날 속에서도 이들을 버티게 한 건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었다. 김형언씨는 “가족이 없었다면 견뎌내지 못했다. 가족을 다시 만나리라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했다”고 말했다. 박 선장 등은 5일 오전 김해공항에서 가족들과 눈물의 상봉을 했다. 박 선장의 딸 지수(22)씨는 “다시는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정부가 단단히 대비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원들은 각자 집에서 휴식한 뒤 6~7일쯤 부산시내 병원에서 정밀검진을 받을 예정이다.

부산=위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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